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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30년 안쪽에 생긴 표현입니다. 예컨대 미국에서는 '검둥이(Negro, nigger)'라는 말은 물론이고 '흑인(black)'이라는 말도 그 뉘앙스가 좋지 않아서 점잖은 자리에선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이라는 말을 씁니다.


  한국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이 실천되고 있습니다. 영어의 영향을 받은 거지요. 예전에 '식모'라고 불렀던 사람들을 '가정부'라고 부르다가 요즘은 '가사도우미'라고 합니다. '보험외판원'은 생활설계사'로 부르고, '차장'은 '안내원'으로 부르고, '광부'는 '광원'으로 부르고, '청소부'는 환경미화원'으로 부르고, '정신지체아'는 '학습곤란자'라고 부릅니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던 말을 버리고 중립적 또는 긍정적 뉘앙스를 담은 말을 쓰는 것을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은

위선일 뿐일까?                                                         정치적 올바름의 효과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새 단어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쓰던 단어의 이미지가 새 단어에 금방 달라붙습니다. 몇 년만 지나면 똑같아집니다. '형무소'를 '교도소'라고 부른다고 해서 '교도소'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좌파들은 그런 정치적 올바름을 위선이라고 비판합니다.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실제 환경을 개선해야지,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환경을 개선해야지, 이름만 바꿔 부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름만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예를 갖춰서 부르면 이건 속임수라는 겁니다.

  이 견해는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습니다. 이름만 바꿔 부르는 게 큰 의미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는 건 말이나 글에 기품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쓸 때 원칙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가

글의 결을 해쳐선 안 된다                                              '외국인 노동자'를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부르려면 '이주 노동자'라고 해야 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에는 어떤 편견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글에서라고 늘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여공'이라는 말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부르면 '여성 노동자'가 도비니다. 그런데 1970년대를 회상하는 글이 있다고 칩시다. 그 시절에는 '여성 노동자'라는 말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글에서 '구로공단의 여성 노동자들'이라고 쓰는 것은 좀 어색할 것 같습니다. '구로공단의 여공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실감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글을 쓸 때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는 건 중요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기 위해서 글의 결을 해쳐서는 안 됩니다.




/고종석의 문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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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왜 한글을 창제했는가?          


                                                                                    SNS 글쓰기와 한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릴 거리가 생각나네요. 제가 아까 위에서 말한 '최애캐'란 말 다 잇죠?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라는 뜻입니다. 보통 한국 사람들이 최애캐 하면 떠올리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물론 젊은 사람들은 '소녀시대' 같은 걸그룹도 떠올릴 테고, 김연아 선수도 떠올릴 테고 그럴 테지만.


 수강생                     세종대왕이요.


  그렇죠. 세종대왕이죠? 한국인 대부분에게 '최애캐'는 세종대왕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는 분도 계시겠지만, 세종대왕을 꼽는 분이 더 많을 겁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한글 창제입니다.
  한글은 그야말로 한국어에 딱 맞춰진 글자입니다.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해서 한글만큼 좋은 글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원리는 보면, 한글 창제자들의, 그러니까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음운학 지식이 20세기 음운학자들 못지핞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컨대 'ㄱ'이라는 파열음에 유기성('ㅎ' 소리)이 더해지면 한 획을 더해 'ㅋ'을 만들고, 유기성이 완전히 사라지면 글자를 반복해 'ㄲ'을 만들고. 'ㄷ' 'ㅌ' 'ㄸ'이나, 'ㅂ' 'ㅍ' 'ㅃ'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리들은 유기성의 정도만 다를 뿐, 소리를 내는 곳이 똑같습니다. 로마문자에선 이런 체계성을 전혀 볼 수 없어요. 예컨대 'G'와 'K' 'D'와 'T' 사이에는 아무런 형태적 유사성이 없습니다. 소리 나는 곳이 같은데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글을 로마문자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질문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음소보다 더 작은 단위인 자질, 예컨대 유기성이라는 자질까지 고려해 그것을 글자 모양에 반영했으니까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보면 한글은 로마문자나 키릴문자 같은 음소문자보다 덜 발달한 문자체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멀쩡하게 음소문자를 만들어놓고, 이걸 음절 단위로 네모나게 모아서 쓰잖습니까? 한자나 가나처럼 말입니다. 문자 발달사에서 음절문자는 음소문자보다 덜 발달된 문자체계입니다. 한글을 음절 단위로 모아쓰게 된 건 한자의 영향이었겠지요.
  수강생 한 분이 한글 창제를 두고 애민정신을 이야기했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애민정신 대문이었을까요? 물론 세종대왕에겐 애민정신이 있었겠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백성을 사랑했을 겁니다. 그렇지만 세종이 정말 백성들을 사랑해서 한글을 만들었겠어요? 봉건시대 군주가요? 그렇게 백성을 사랑했으면 한글을 만들기 전에 일단 노비부터 해방시켰어야지요. 오직 백성을 사랑해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은 그저 공식적으로 유통되는 거짓말일 뿐입니다.
  그러면 세종은 왜 한글을 창조했을까요? 역사학자들이나 언어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를 꼽습니다. 첫 번째는 백성세계의 의식 성장입니다.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웠는데 그사이에 백성세계의 의식도 성장한 것입니다. 이 백성세계를 통제할 필요가 있어진 겁니다. 통제를 하려면 통제 대상이 뭘 좀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완전히 까막눈인 사람들은 통제도 못합니다. 말이 전달돼야 통제가 되는 겁니다. 말하자면 백성세계의 의식 성장에 맞서서 전제군주가 '아, 이 백성들 안 되겠네. 자꾸 기어오르는데 좀 다잡아야겠다', 이런 게 아마 첫 번째 이유였을 겁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자마자 <용비어천가>라는 걸 씁니다. 세종의 조상들이 모두 완전히 신이에요. 날아다니기도 하고 호랑이도 때려잡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용비어천가>는 일종의 건국신화입니다. 조선왕조의 건국신화. 그런데 이걸 애민 운운하면 안 됩니다.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초창기 문헌인 <용비어천가>에서 세종이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는지 우리는 그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서, 불쌍히 여겨서 만들었다고 말은 하지만, 물론 어여삐 여긴 마음도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부차적 이유였겠죠.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뭘까요? 한글의 원래 이름은 훈민정음입니다. 훈민정음이 무슨 뜻이죠. 이걸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한다면 '바른 소리를 백성들에게 가르친다'가 되겠지만, 명사구로 생각한다면 '백성들을 가르치는 올바른 소리'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그러면 이 '바른 소리'라는 건 뭘까요? 바로 당대의 중국어 발음입니다. 삼국시대 이후 한자가 수입되면서, 수많은 중국어 단어가 한자어의 형식으로 차용됐습니다. 그렇지만 그 단어들은 한국어 음운체계에 동화돼 세종 시절에는 중국어 발음과 너무 달라져버렸어요. 지금도 그렇죠. 天을 한국인들은 '천'이라고 읽지만, 중국인들은 '티엔' 비슷하게 읽습니다. 세종이 한글을 반포하며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라고 말했죠? 세종은 이걸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때까지의 한국어 한자 발음을 되도록 중국어 원음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것입니다.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를 알려줘야 하니까 소리글자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요. 그러니까 '훈민정음'에서 '정음'이라는 건 대체로 중국인들의 발음에 가까운 소리를 말합니다. 그 소리를 백성에게 가르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겁니다. 그 당시 한자 옆에 표기된 훈민정음을 보면 실제로 15세기에는 그 한자를 그렇게 읽지 않았는데도 되도록 당대 중국에 발음에 가깝게 토를 단 게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글 창제의 동기는 애민정신이라기보다, 뭐 기본적으로 애민정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웃음) 애민 정신이 있었겠죠.(웃음) 그렇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백성세계의 의식이 성장해 천한 것들이 대들려고 하니까 이거 중심 좀 잡아야겠네,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당시 사람들의 한자음이 중국인들의 한자음과 너무 달라져 있으니까, 완전히 똑같게는 못할지라도 중국어 발음과 좀 가깝게 가르쳐보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종석의 문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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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과 언어의             

경계                        


   언어와 방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때에 우리가 그것을 독립된 언어로 부르고 어떤 때에 우리가 그것을 방언이라고 부를까요?


   예컨대 충청도에서 사용하는 말은 그냥 한국어의 방언이라고 생각 합니다, 당연히. 그렇지만 일본어를 한국어의 방언이라고 생각하진 않죠? 중국어도, 보통화(표준어)든 광둥어든 한국어의 방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방언과 방언이 아닌 독립된 언어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방언과 언어의 사이를 가를까요?


 수강생1                     국경이요.


  국경? 좋은 지적입니다. 그렇지만 벨기에의 경우, 남쪽에서는 프랑스어를 쓰고 북쪽에서는 네덜란드어를 쓰고 또 한쪽 귀퉁이에는 독일어를 쓰는 지역도 있습니다. 물론 벨기에에서 쓰는 네덜란드어와 네덜란드에서 쓰는 네덜란드어가 아주 똑같지는 않습니다. 또 벨기에에서 쓰는 프랑스어와 프랑스에서 쓰는 프랑스어가 아주 똑같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벨기에 남부에서 쓰는 언어는 엄연히 프랑스어고, 북부에서 쓰는 언어는 엄연히 네덜란드어입니다. 그러니까 국경이라는 건 언어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영국에서 쓰는 언어와 미국에서 쓰는 언어를 우리는 같은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언어의 방언일 뿐이죠. 그럼 뭘까요? 언어와 방언의 차이는?
  민족? 그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같은 민족이라 할지라도 예컨대 어떤 민족이, 옛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킨 한민족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러시아어나 그 지역 소수언어를 씁니다, 그분들 주변 사람들처럼. 그렇다고 해서 이주 한민족, 고려인이라고 부릅니다만, 고려인이 쓰는 러시아어라고 해서 러시아어가 아닌 것은 아니죠? 또다른 분?


 수강생2                     문자체계나 문법이요.


  문자체계? 이건 아무 상관이 없어요. 세르비아에서 쓰는 세르비아어는 로마문자로 쓰기도 하고 키릴문자로도 씁니다. 키릴문자라는 문자가 있어요. 러시아를 비롯해서 몽골과 동유럽 몇 나라에서 씁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언어를 로마문자로 쓰기도 하고 키릴문자로 쓰기도 해요. 더구나 로마문자는 중서부 유럽어들만이 아니라, 터키어, 베트남어, 말레이인도네시아어를 표기하는 데 사용됩니다. 문법이라? 이탈리아어와 포르투갈어의 문법은 거의 비슷한데, 그 두 언어가 같은 언어는 아닙니다. 또 한국어 문법과 일본어 문법은 굉장히 닮은 거 같은데요? 제 생각에. 저는 일본어를 잘 모릅니다. 사실 거의 모르는데 일본어를 흘끗 들여다보면 한국어와 문법이 거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어와 일본어는 다른 언어죠.


 수강생3                     따로 학습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요.


  정답에 거의 근접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따로 학습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거라면 다른 언어가 아니라 방언이지요? 조금만 더 나아가봅시다. 다른 분?


 수강생4                     그 의미가 통하는 언어요.


  그렇습니다. 의사소통 가능성입니다. 어떤 두 화자가 자기만의 언어로 얘기할 때 의사가 소통되면, 그 사람들은 한 언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즉 억양이나 단어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의 언어는 한 언어의 방언일 뿐이지 다른 언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두 사람이 만나서 자기들 언어로 얘기를 하는데 의사가 소통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어와 방언을 구분 짓는 것은 의사소통 가능성입니다.


 수강생5                     북유럽 같은 데서 노르웨이어나
                                스웨덴어 같은 경우,
                                다른 나라 말이라고는 하지만
                                의사소통이 된다고 하던데요.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언어와 방언을 가르는 기준을 의사소통 가능성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은 순전히 언어학적 기준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순수하게 학술적으로만, 이론적으로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정치가 개입합니다. 정치, 이게 항상 문제입니다. 말씀하셨듯이 북유럽엔 노르웨이가 있고 스웨덴이 있고 핀란드가 있고 덴마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핀란드어는 다른 유럽어와 전혀 상관없는 언어입니다. 핀란드어만이 아니라 헝가리어, 리투아니아어 같은 언어들은 주변 국가들 언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질적 언어예요. 차라리 언어 유형으로 보면 우리말에 더 가까운, 한국어에 더 가까운 그런 언어들입니다. 그러니까 핀란드는 제쳐놓고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세 나라의 언어 얘기를 잠깐 하죠. 우리는 흔히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나라 사람들은 자기들 언어로 이웃나라 사람들과 얘기하면 다 의사가 통합니다. 그러니까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라고 우리가 부르는 건 언어학적 기준으로는 한 언어의 방언들에 불과합니다. 특히 노르웨이어라는 건 덴마크어의 한 방언과 스웨덴 언어의 한 방언을, 이 두 개를 합쳐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 나라 사람들은 말이 자유롭게 통합니다.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유틀란트반도에는 크게 네 개의 방언으로 이뤄진 한 언어가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적으로 노리웨이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이렇게 말합니다. 그건 뭐냐, 언어와 방언을 가르는 언어학적 기준은 의사소통 가능성이지만, 정치가 개입하면 가끔 그 언어를 독립된 언어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 뜻입니다. 덴마크라는 나라, 스웨덴이라는 나라, 노르웨이라는 나라가 있으니까, 덴마크어, 스웨덴어, 노르웨이어라고 하는 겁니다. 사실 이런 용법은 정치적으로 오염된 것이죠.
  유고슬라비아란 나라가 냉전이 끝나고 나서 내전이 터진 뒤에 여러 나라로 분열됐습니다. 세르비아란 나라가 있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그로아티아, 마케도니아, 이렇게 여섯 나라와 코소보, 보이보디나라는 자치주로 쪼개졌습니다. 아주 먼 얘기도 아닙니다. 여러분들한테는 먼 얘긴지 모르겠는데 저는 자랄 때 지리 시간에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배웠지만,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세계사 시간에 세르비아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지만요. 아무튼 1991년엔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에 내전이 터졌습니다. 그 내전의 결과로 옛 유고슬라비아는 지금 여러 나라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 시절엔 그 나라의 공용어를 세르보크로아티아어라고 불러씁니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쓰는 언어라는 뜻이지요. 사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의 언어는 언어학적 기준으로 보면 방언적 차이만 있을 뿐 한 언어입니다. 그런데 내전의 결과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가 서로 다른 나라가 된 지금, 우리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세르비아에서는 세르비아어를 쓰고, 크로아티아에서는 크로아티아어를 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정치적 기준이 언어학적 기준을 압도한 결과입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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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어는 언어인가,        

방언인가?                   


                                                                                                만약에 여러분들 누군가가, 강남구 분이라도 좋고 전라도 분이라도 좋고 충청도 분이라도 좋고 경기도 분이라도 좋고 어려서부터 배운 말을 사용하고, 제주도에서 자란 어떤 분이 어려서 배운 말, 그러니까 텔레비전이나 학교를 통해서 배운 말 말고 어려서 배운 말, 어머니한테서 배운 말 가지고 서로 얘기를 한다고 칩시다. 의사소통이 될까요? 불가능합니다. 제주도 사람 말과 육지에 사는 사람 말은 사실은 다른 언어입니다. 언어학적 기준으로는요. 물론 서로 굉장히 가까운 언어이긴 합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선 언어학적으로 두 개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어와 제주어, 이 두 개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주라는 곳은 아주 예전부터 한반도에 부속돼 있었고 한반도와 한 나라, 한 정치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는 국민국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주어는 한국어의 방언이 아니라 한국어와 다른 언어다, 누가 이런 주장을 했다고 해보세요. 제주 사람들에게나 육지 사람들에게나 이건 절대 좋은 뉴스가 아닙니다. 정치인들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제주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날지도 모르죠. 그런 염려 때문에 제주어는 한국어의 방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육지 사람과 '다른 언어'를 쓰는데도 우리는 그냥 '제주 방언'이란 표현을 씁니다. 제주 방언이란 말은 사실은 정치적으로 오염된 표현입니다. 아시겠죠? 그러니까 실제로 제주어는 한국어와 다른 언어인데, 만약에 제주도에서 쓰는 말을 곧이곧대로 다른 언어라고 하면 국민통합에 치명적 지장이 생깁니다. 골치 아픈 문제죠. 그래서 정치적 고려로 제주어는 한국어의 한 방언이다, 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물론 제주어가 한국어와 다른 언어이긴 하지만, 모든 자연언어 가운데 한국어와 가장 가까운 언어인 건 사실입니다.
  일본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일본열도를 내려가다 보면 오키나와라는 섬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류큐라고 불렸습니다. 제주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류큐 사람들도 자기가 어려서 배운 언어를 사용하면 도쿄나 오사카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이란 국가 안에도 일본어라는 언어와 오키나와어라는 언어가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주도의 경우와 똑같이, '아! 저건 일본어가 아니다' 그러면 오키나와 사람들은, '그래? 아, 잘됐다, 우리 독립할래', 그러겠지요. 사실 오키나와는 류큐라는 이름의 독립국이었습니다. 류큐가, 다시 말해 오키나와가 일본에 정치적으로 완전히 복속된 것은 19세기입니다. 그전에는 일본과 가까운 나라이기는 해지만, 일본의 일부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에 미군이 많이 주둔해 있는데 본토에는 거의 없고 대부분 오키나와에만 주둔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본토 사람들에게 불만이 큽니다. 미군 관련 범죄도 다 오키나와에서 일어나고, 미군 주둔 지역이니 만약에 전쟁이 터지면 본토보다 오키나와가 적국의 공격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지요. 그런 상황에서 "오키나와어, 그건 일본어와 다른 언어야" 이런 소리가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정치인이 그런 말 했다가는 정치 생명 끝장입니다.(웃음) 결국, 사실에 눈을 감고 "오키나와어는 일본어의 한 방언이야. 그건 다른 언어가 아니야"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어와 방언의 차이는 이론적으로는 의사소통 가능성에 있지만 드물지 않게 정치적 고려가 개입한다, 이 얘깁니다. 제주어와 오키나와어가 한국어와 일본어의 방언으로 불리듯 말이죠. 거꾸로 앞서 말씀드렸듯 한 언어의 방언에 불과한데도, 서로 다른 언어로 불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가 그렇고,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가 그렇습니다.


/고종석의 문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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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는 명백한           

한국어                      


                                                                                                  한국어 문장은 번역문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로 글을 쓸 때 번역 문투를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설령 번역 문투를 피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해도, 고유어만으로 된 문장을 쓰는 건 전혀 불가능합니다. 어떤 글이든, 그것이 진지한 논문이든 아니면 비교적 가벼운 기사 글이든, 글에서 쓰는 말은 우리 고유어보다 한자어가 훨씬 많습니다. 그 한자어의 70~80퍼센트는 19세기 말 이후에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한자어는 1900년대 말까지는 아예 없었던 말들입니다. 한자어 중에서 개화기 이래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어를 통해 들어온 것이 압도적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전에 중국어를 통해서 들어온 말도 있습니다. '천지天地' '세상世上' '부모父母' 같은 말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말들은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 한국과 일본에서도 쓰이게 된 말입니다. 일본에서 난학을 포함한 양학이 개화하기 전의 한자어는 거의 다 중국 사람이 쓰는 말을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 빌려서 썼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이후 한국이 일본의 정치적ㆍ문화적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면서 한국어에서는 일본제 한자어들이 중국제 한자어들을 압도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이제 한국어가 되었습니다. 완전한 한국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문화文化'라는 말은 영어 culture를 일본 사람들이 文化라고 번역한 것이 우리말에 수입돼 우리식 발음으로 읽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화는 일본어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닙니다. 그것은 명백한 한국어입니다. 文化를 '문화'라고 읽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한국어 사용자들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글에서 한자어를 쓰지 않겠다는 강박관념을 지닐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한자어는 우리말입니다. 명백한 한국어입니다. 사실 한자어를 전혀 안 쓰겠다고 마음 먹으면, 우리는 두세 문장도 쓰기 어려울 겁니다.

 

한국어의 세 가지 층: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        



                                                                                       고대 이래로 중국에서 한자어가 천천히 차용되면서, 그리고 19세기 말 이후 일본에서 한자어가 급속히 차용되면서 한국어 어휘에는 층이 생기게 됐습니다. 고유어와 한자어의 층이 생긴 거지요. 그 위에 외래어가 있습니다. 고유어와 한자어와 외래어는 차례로 한국어 어휘부를 형성했습니다. 맨 아래에 고유어가 있고, 그 위에 한자어가 있고, 맨 위에 외래어가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그 세 층의 단어들은 유의어를 이루기도 합니다. 예컨대 소젖(쇠젖)과 우유와 밀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외래어는 한자엄나큼 많지는 않으니까 이런 세 층의 유의어들은 드물고, 고유어와 한자어 두 층으로 이뤄지는 유의어쌍이 한국어에는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여름옷과 하복, 겨울잠과 동면, 가을밤과 추야, 봄바람과 춘풍, 가슴둘레와 흉위, 몸무게와 체중, 뺌셈과 감산, 곰셉과 승산, 덧셈과 가산, 나눗셈과 제산, 제곱과 자승, 세모꼴과 삼각형, 가로줄과 횡선, 세로줄과 종선, 아침밥과 조반, 배앓이와 복통, 살갗과 피부,온몸과 전신, 엉덩이와 둔부, 누에치기와 양잠, 피와 혈액, 목숨과 생명, 사람과 인간, 날씨와 일기, 값과 가격, 곳과 장소, 새와 조류 따위가 그렇습니다.
  이런 유의어쌍들을 보면 고유어들은 대체로 친숙한 느낌을 주고, 한자어들은 공식적인 느낌을 줍니다. 나쁘게 말하면, 고유어들은 좀 없어 보이고, 한자어들은 좀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고유어와 한자어가 유의어쌍을 이룰 때 문장에서 한자어를 쓸 것이냐는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어떤 경우엔 한자어가 더 적절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엔 고유어가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나라사랑이 지나쳐서 될 수 있으면 고유어만 쓰겠다, 라고 마음먹은 사람은 그래도 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자어는 절대 안 쓰겠다' , 그건 아주 바보 같은 짓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건 한국어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말에서는 한자어라고 부르는 단어들을 일본어에서는 간고漢語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도 간고는 좀 있어 보이고, 고유어는 좀 없어 보입니다. 물론 없어 보이는 대신에 친숙함과 정감이 있지요. 이것은 한국어에서나 일본어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아, 그리고 세상에 동의어라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유의어가 있을 뿐입니다. 제가 앞에서 예로 든 고유어와 한자어들의 쌍도 동의어가 아니라 유의어일 뿐입니다. 이 말들이 똑같은 맥락에서 똑같은 의미와 뉘앙스를 지니고 쓰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뜻이 비슷한 말은 존재해도 뜻이 완전히 겹치는 말은 없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에 고유어와 한자어의 유의어쌍이 있듯이, 영어에도 고유어, 게르만계 단어라고 부르죠, 암튼 고유어와 프랑스계(라틴계) 단어들의 유의어쌍이 있습니다. 1066년에 프랑스 노르망디라는 지방을 다스리던 윌리엄이라는 사람이, 프랑스말로는 기욤이라고 부릅니다만, 잉글랜드에 쳐들어가 정복왕조를 세운 뒤에 오래도록 잉글랜드 상류층에서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만 썼기 때문입니다. 한참 뒤에 프랑스와의 100년전쟁으로 반프랑스 감정이 심해져서 잉글랜드의 귀족들도 영어를 쓰기 시작할 무렵엔, 이미 영어에 너무나 많은 프랑어계 단어가 침투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영어에는 게르만계 단어와 프랑스-라틴계 단어의 유의어쌍이 무수히 존재합니다. 동사를 예로 들어보자면, to give와 to donate, to hinder와 to prevent,  to answer와 to reply, to understand와 to comprehend, to bury와 to inhume, to foretell과 to predict, to sweat과 to perspire, to end와 to finish, to sell과 to vend, to uproot와 to eradicate, to begin과 to commence, to feed와 to nourish가 그 예입니다. 영어에서도 한국어나 일본어에서와 비슷하게, 게르만계 단어들은 친숙하되 좀 없어 보이고, 프랑스-라틴게 단어들은 좀 딱딱되 있어 보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골짜기를 뜻하는 게르만게 단어 dale은 비슷한 뜻의 프랑스계 단어 valley보다 더 우아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한국어에서 한자어 '족'이 고유어 '발'보다 좀 비속하게 들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예외적입니다.
  명사를 예로 든다면, 영어의 inside와 interior, outside와 exterior, birth와 nativity, backbone과 spine, breath와 respiration, work와 labor의 관계는 한국어의 안과 내부, 바깥과 외부, 태어남과 출생, 등뼈와 척추, 숨쉬기와 호흡, 일과 노동 사이의 관게에 얼추 견줄 만합니다. 앞쪽은 정감 있고 친숙하되 좀 없어 보이고, 뒤쪽은 딱딱하게 들리지만 좀 있어 보입니다. 이 말들이 동의어가 아니라 유의어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해야겠습니다. 게르만계 단어들에 대응하는 프랑스-라틴계통의 유의어들이 영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듯, 고유어에 대응하는 한자어 유의어들은 한국어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그것들은 솎아내야 할 찌꺼기가 아니라 품어 안아야 할 자산입니다.
  그것은 이 유의어들이 호환이 안 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컨대 '목숨'과 '생명'을 봅시다. '우리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자'는 '우리 생명을 걸고 조국을 지키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꽃도 생명을 지니고 있다'라고는 말하지만, '꽃도 목숨을 지니고 있다'라고는 말하지 않스비다. '목숨'은 유정명사에만 쓰일 뿐 '꽃' 같은 무정명사에는 쓰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정명사는 사람과 짐승(벌레도 마찬가지입니다)을 아우르는 말이고, 무정명사는 식물과 무생물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유정명사와 무정명사 얘기가 나온 김에 여격 조사 '-에'와 '-에게'에 대해서 잠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격 조사 '-에게'는 유정명사 다음에 붙고 '-에'는 무정명사 다음에 붙습니다. 그래서 '철수에게 물을 주다' '소에게 물을 주다'라고 말하는 반면 '꽃에 물을 주다' '돌에 물을 뿌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문적 글쟁이들 가운데도 이걸 구별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거 꼭 기억해두세요. 여격 조사 '-에게'는 유정명사, 즉 사람을 포함한 동물 뒤에 쓰고, '-에'는 무정명사, 곧 식물과 무생물 뒤에 씁니다!
  다시 '목숨'과 '생명'으로 돌아가봅시다. '생명'은 사물에 대해 비유적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미당 서정주의 작품들은 생명이 길 거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당 서정주의 작품들은 목숨이 길 거야'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또 '한 생명을 잉태하다'라는 표현은 자연스럽지만, '한 목숨을 잉태하다'라는 말은 부자연스럽니다. 이렇게 '목숨'과 '생명'은 비록 유의어라고는 할 수 있을지라도, 서로 교환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목숨'만 필요한 게 아니라 '생명'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명백히 서로 교환할 수 없는 유의어싸은 드물지 않습니다. 피와 혈액은 봅시다. 혈액은 물질로서의 피만을 가리켜서 위학적 뉘앙스를 갖습니다. 그래서 생명현상과 관련된 다양한 비유의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예컨대 '피 끓는 젊음' '정말 피를 말리는구먼' '피를 나눈 사이'라는 말은 장녀스럽습니다. 그렇지만 '혈액이 끓는 젊음'이나 '정말 혈액을 말리는구먼'은 틀린 한국어이거나 익살이죠. 누구에게선가 수혈을 받았다면 그 사람과 '혈액을 나눈 사이'라고 말할 수도 있곘지만, 이 역시 어색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라고는 해도 '머리에 혈액도 안 만른 놈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웃음)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일 수는 있겠죠.
  사람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와 '사람은 말물의 영장이다'라는 문장만 보면 인간과 사람이 동의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쓰임새는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다소 추상적인 단어여서 '사람'이 사용되어 구체적 문맥에서 '사람'을 대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였네'라거나 '저기 사람이 있네'라거나 '젊은 사람이 왜 그래?'라거나 '프랑스 사람' 같은 표현에서 '사람'을 '인간'으로 바꾸면 틀린 한국어이거나 비아냥거림이 되고 맙니다. 다시 말해 이들 경우에는 특수한 문제적 의도를 노렸을 때만, '사람'을 '인간'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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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에서 온 한자어         


                                                                                             제겐 동서의 문명교섭에서 가장 찬란하게 느껴진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눈부시게 찬란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 있습니다. 18세기 말, 그러니까 쇼군이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그즈음에 시작된 '난학蘭學(란카쿠)'의 장면입니다. 막부 시대는 천황에게 아무런 힘이 없던 시절입니다. 천황은 쇼군의 꼭두각시였어요. 천황이 힘을 가지게 되는 건 메이지 유신 때부터입니다. 메이지유신으로 왕정복고가 돼 천황이 국가의 실질적 우두머리가 되기 전의 일본은 당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쇄국정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예외를 뒀습니다. 나가사키예요. 제2차 세계대전 때 핵폭탄이 떨어졌던 나가사키 말입니다. 막부는 오직 이 항구 도시에 오직 네덜란드 사람들만 들어와서 교역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유럽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곳의 일본인 통역사들과 에도(지금의 도쿄)의 지식인들이 힘을 합쳐 '네덜란드 배우기 운동'을 벌입니다. 이것을 난학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중국 빼고는 자신들이 세상에서 제일 센 줄 알았는데, 사실은 막부가 들어서기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뒤 명나라를 정복하겠다고 조선을 침공한 것을 보면 중국도 별 게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막상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유럽문물을 접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네덜란드어 사전편찬 작업을 시작으로 유럽 문물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난학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네덜란드만이 아니라 서양문물 전체를 연구하는 양학洋學(요가쿠)으로 발전합니다. 미국으로부터 강제로 개항을 당하고 보니, '아, 네덜란드보다 센 놈들이 많구나 영국이나 미국은 네덜란드보다 훨씬 세구나' 하는 걸 알게 되지요. 아무튼 난학에서 시작된 양학은 그 뒤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 노선을 뒷받침합니다.
  난학의 시작이 네덜란드어 사전편찬이었듯, 난학을 포함한 양학의 요체는 번역이었습니다. 번역이라는 게 본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본의 난학자들이 수행한 번역은 특히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동아시아에 없던 개념들을 번역해야 했으니까요. 아무튼 난학자들과 메이지유신 이후의 양학자들은 두 세기에 걸쳐서 서양문명 전체를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그 번역의 수단이 한자였습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유럽인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유일한 문명권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에 앞서서 유럽을, 서양 세계 전체를 한자로 번역해버린 겁니다. 그 한자어가 바로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어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낸 한자어의 상당수는 심지어 한자의 원산지인 중국에까지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말할 나위가 없지요. 원래 우리가 쓰던 한자어는 중국 한자어와 구조가 많이 닮았었는데 지금의 한자어는 대부분 일본 한자어와 구조가 같습니다.
  일요일ㆍ월요일ㆍ화요일… 같은 요일 이름들, 수소니 산소 같은 원소 이름들, 연설이니 재판소 같은 말들은 죄다 네덜란드어를 일본 사람들이 한자어로 옮긴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 우리식 발음으로 읽고 있는것입니다. 일부 극단적 국어순수주의자들, 순혈주의자들처럼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를 하나도 쓰지 말자고 결심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단30초도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사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말도 일본 사람들이 만든 한자어입니다. 이런 말을 쓰면 안 된다고 말하는 주장, 곧 '언어민족주의'라는 말도 일본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언어' '민족' '주의' 모두 일본 사람들이 유럽어를 번역하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제든 중국제든 한자어를 쓰지 말자는 것은 입 다물고 살자는 뜻입니다. 이 한자어 이야기는 다음번 강의 때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종석의 문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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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타고난 것인가?     


                                                                                             글쓰기 능력이라는 건, 그러니까 말을 다루는 솜씨라는 건 타고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에 전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면, 여러분이 이 자리에 계실 필요가 없습니다.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불행하게도, 제 생각에 모든 뛰어남이라는 건 압도적으로 타고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분야에 따라서 타고남의 정도는 큰 차이가 있는 게 확실합니다.
  음악이나 수학 같은 분야는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을 갖추는 게 불가능합니다. 절대음감을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리 듣고 또 들어봐야 그 소리가 그 소리일 겁니다. 저도 도레미파솔라시도를 구분 못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대화를 하면서도 '아, 저건 지금 시네, 파네' 이렇게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 이런 타고난 천재라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수학적 추상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학사의 천재들을 보면 대개 열 살 이전부터 그 재능이 드러납니다.
  흔히 가장 위대한 수학자라고 불리는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의 유명한 예를 들어봅시다. 가우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얼마 뒤, 선생님이 산수 시간에 어린이들에게 1에서 100까지 다 합하면 얼마가 되는지 계산해보라고 했답니다. 선생님은 당연히 시간이 한참 걸릴 줄 알았는데, 가우스란 어린이가 "5,050이요"라고 즉석에서 말해버린 겁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 아이가 원래 답을 알고 있었나, 하는 의심도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꼬마 가우스에게 5,050인 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가우스가 대답했습니다. "첫 수인 1이랑 마지막 수인 100을 더하면 101이고, 두 번째 수인 2와 마지막에서 두 번째 수인 99를 더해도 101이고, 세 번째 수인 3이랑 마지막에서 세 번째 수인 98을 더해도 101…그래서 101 X 50 하니까 5,050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일화죠?(웃음) 우리가 이 일화를 알고 있으니까 그리 놀랍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꼬마 가우스는 이 수리능력을 어디서 배운 게 아니라 타고난 것입니다. 문제가 제시된 순간, 수학적 추상능력이 곧바로 발동해버린 겁니다.
  수학은 결국 천재들의 학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천재들이 수학의 역사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에바리스트 갈루아(évariste Galois, 1811~1832)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인데 이 사람은 대학시험에 계속 떨어졌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수학자가 되려면 보통 파리이공학교라는 나폴레옹이 세운 특수학교에 갑니다. 파리이공학교도, 프랑스말로는 에콜 폴리테크니크라고 하는데, 그랑드제콜 가운데 하나입니다. 갈루아는 이 학교에 두 번 시험을 쳤는데 두 번 다 떨어집니다. 왜 떨어졌냐면, 채점관들이 에바리스트 갈루아의 답안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수험생들은 시험관보다 덜 똑똑해야 합니다. 수험생들이 시험관보다 똑똑하면 인생 완전히 망가지는 겁니다.(웃음) 이 친구는 그래서 결국 대학엘 못 가고 혼자서 수학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스물두 살엔가 어떤 여자를 사이에 두고 어떤 사내와 결투를 벌였다가 총에 맞아서 죽습니다. 갈루아는 견결한 공화주의적 신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요즘 한국말로 하면 운동권이었지요. 그래서 이 결투가 경찰에서 갈루아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이뤄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갈루아는 결국 정치에 휩쓸려 죽은 셈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결투에 나서기 전날 밤새워 대단한 논문을 씁니다. 수학사의 한 획을 그은 논문입니다. 저는 수학을 잘 모르는데 '군群 이론'이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갈루아가 죽기 전에 쓴 논문이 이 이론의 토대가 됐습니다. 갈루아는 방정식이론에도 아주 큰 기여를 했습니다. 5차 이상의 방정식은 대수적 방법으로 풀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 했습니다. 사실 갈루아가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가 쓴 논문전집이라고 해봐야 몇 페이지 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갈루아는 수학사에서 불멸의 이름이 됐습니다. 음악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차르트도 일찍 죽었지만, 설령 더 일찍 죽었다고 해도 음악사에서 불멸의 이름이 됐을 겁니다.
  특히 수학사를 보면 일찍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고, 또 오래 살았다고 해도 중요한 업적을 10대, 20대 때 다 끝내버립니다. 나머지 인생은 대충대충 놀며 가르치며 사는 겁니다. 심지어 물리학도 그렇습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도 자신의 중요한 업적을 20대, 30대 때 다 이뤘습니다. 그 이후엔 그저 명성으로 살았습니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것(1921년)도 상대성이론으로 받은 게 아닙니다. 한참 전에 발표한(1905년) 광전효과에 관한 노문으로 받은 것입니다. 광전효과라는 건, 금속에 빛을 쪼이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전까지 알려진 빛의 이론, 즉 빛의 파동론으로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빛은 파동이면서 입자라는 대담한 가설을 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건 중학생들도 아는 물리학 상식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건 상대성이론이랑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상대성이론이든 광양자이론이든 아인슈타인이 다 젊어서 세운 이론입니다. 아인슈타인이 중년 이후에 세운 업적이라는 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물론 예외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까지 새로운 이론을 세운 수학자들이나 뛰어난 곡을 만든 음악가들이 있긴 합니다. 아까 예로 든 가우스 같은 이가 그랬습니다. 거의 아흔이 다 되도록 살았는데, 일생 동안 슬럼프 없이 업적을 남겼습니다.

글은 재능이 아닌            

훈련에 달렸다!              



                                                                                            그렇다면 글쓰기의 경우엔 어떨까요? 제가 처음 말씀드렸듯, 모든 뛰어남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고나는 겁니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수학이나 음악과는 다릅니다. 음악이나 수학은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다를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글쓰기는 다릅니다. 물론 글쓰기 능력이라는 것도 저는 어느 정도 타고난다고 생각합니다. 말에 대한 감각, 말을 다룰 줄 아는 능력 같은 게 어느 정도는 타고난다고 생각하는데, 음악이나 수학과 달리 이건 충분한 훈련이나 연습으로 크게 개선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 중에서도 시는 음악이나 수학처럼 타고난 재능에 많이 의존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랭보라는 시인 아실 겁니다. 이 양반은 10대 말부터 20대 초까지 시를 다 쓰고 나머지 인생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산 사람입니다. 그래도 문학사에서 불멸의 이름이 됐습니다. 꼭 랭보가 아니더라도, 시인들의 경우엔 첫 시집이 가장 뛰어난 시집이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젊은 시절에 재능이 발휘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산문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글에 큰 영향을 준 분 가운데 김현이란 분이 계십니다. 지난 세기 90년에 마흔여덟 살 나이로 돌아가신 분입니다. 불문학자고 문학평론가셨는데 이분이 젊었을 때, 20대에 쓴 글을 지금 읽어보면 너무 어설픕니다. 어떻게 김현이 이런 글을 썼을까 싶습니다. 일찍 평론가로 데뷔해서 일찍부터 글을 쓰신 분인데, 데뷔 직후에 쓴 글들을 보면 읽기가 짜증날 정도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글을 못 써도 이렇게 못 쓸 수가 있을까, 이렇게 쓰려고 해도 어렵겠다 싶은데, 이분의 만년 글들을 보면 정말 좋습니다. 한국어 산문의 한 정점에 있다 싶을 정도입니다. 김현 선생이 마지막으로 낸 책이 《말들의 풍경》이라는 평론집입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김현 선생 초기 글들과 비교해보면, 과연 같은 사람이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한 20년 세월이 흘렀다지만,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릅니다.
  이건 김현 선생님 경우만이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20대에 어설픈 글들을 쓴 이들이 훈련을 통해서나 경험을 통해서 완전히 다른 글들을 쓸 수 있는 것 같다는 뜻입니다. 수학자들이나 음악가들이 어렸을 때 또는 젊었을 때보다 더 뛰어난 이론을 만들었다거나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거나 하는 일은 굉장히 드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글 쓰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글이 나아집니다. 특히 산문가들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사람들의 경우 말입니다. 그렇다는 건 글쓰기가 재능에 달린 게 아니라 많은 부분이, 압도적 부분이 훈련에 달려 있다는 걸 뜻하는 것입니다. 재능도 필요하지만, 노력이 훨씬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음악이나 수학을 배우려면, 굳이 여기 있을 필요가 없겠지요? 그건 일정 정도 이상은 배울 수가 없는 거니까요. 제가 설령 수학의 천재라고 하더라도 여러분들한테 줄 수 있는 건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글쓰기는 다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글쓰기 연습을 하는 겁니다.
  제 경험 얘기를 하자면, 전 초등학교 때부터 글 잘 써서 상을 타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다른 상도 마찬가지지만요. 초등학교 때 글짓기 시간도 있고 글짓기대회도 많이 하잖아요? 제 글이 교실 뒤에 걸려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글쓰기 능력을 타고나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글쓰기를 싫어했습니다. 성장기 내내 그랬고, 대학 들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리포트 내는 게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러다가 신문기자가 됐는데 처음 들어간 신문사가 우연히 영자 신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글쓰기를 시작했고, 5년 정도 있다가 한국어 신문으로 와서 한국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대학 졸업할 때까지 글 쓰는 데 너무 무능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막상 직업적 글쟁이가 돼 거의 매일 글을 쓰다 보니, 글이 점점 나아지고 글쓰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도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 말은, 글쓰기 능력이라는 건 타고남의 부분이 굉장히 적은 것이다, 압도적으로 노력과 훈련의 결과다, 그런 뜻입니다.


/고종석의 문장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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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백승기


사피어-워프 가설          



                                                                                                19세기에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제자로 벤자민 리 워프(Benjamin Lee Whorf)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원래 인류학 공부를 할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해서 연구했습니다. 자연히 그 사람들의 언어에 대해서 관심을 쏟게 됐지요. 워프와 사피어는 원주민들에게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무지개 빛깔이 몇 색이냐고요. 무지개 띠가 몇 개냐는 뜻이지요. 그런데 부족마다, 쓰는 언어에 따라 대답이 달랐습니다. 네 개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곱 개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있었고 열 개라고 대답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피어와 어프가 어떤 영감을 떠올렸습니다.
  여러분! 무지개 빛깔이 몇 개일까요? 1장에서도 말씀드렸듯, 무지개 자체는 스펙트럼이어서 사실 띠가 몇 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띠의 수가 무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피어와 워프는 다른 언어를 쓰는 원주민 부족들마다 무지개 빛깔 수를 다르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아! 어떤 언어를 쓰는 사람에겐 일곱 개로 보이는 걸로 봐서, 우리는 모국어의 지령대로 세계를 분단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모국어가 가르치는 대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자연언어에 빛깔을 나타내는 말이 네 개라면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은 빛깔을 네 개밖에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자연언어에 빛깔을 나타내는 말이 열두 개라면 그 언어를 쓰는 사람은 빛깔 열두 개를 구별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계관의 언어결정론 또는 사피어-워프 가설이라고 합니다.
  사피어-워프 가설의 핵심은 세계나 생각이나 인식에 앞서 언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 바깥에서는 생각도 인식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가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생각이나 의식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언어가 있을까요? 아니면 언어가 있은 다음에 생각이나 인식이 있을까요? 어느 쪽이 먼저일까요?


 수강생                     말로 못하는 감정이지만,
                                어떠한 감정이 먼저 있겠죠.


  그렇습니다. 아주 중요한 지적입니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떤 생각이나 인식을 할 수 있고 감정도 지닐 수 있습니다. 생각이나 인식, 감정이 언어보다 먼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피어-워프 가설은 틀린 겁니다. 그렇지요? 이 사람들은 바보입니다. 바보이긴 하지만 한 세기 이상 언어학과 인지과학에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 바보들입니다. 이 사람들 말이 옳다면 실어증 환자들은 전혀 생각을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사피어-워프 가설에 따르면, 말을 못하니까 생각도 못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실어증 환자들도 생각을 합니다. 언어 없이 말입니다. 여기서 생각을 인식, 감정 또는 세계관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습니다. 물론 모든 구속은 상호구속이기 때문에 언어가 생각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독립변수는 생각, 인식, 세계관, 이것들입니다. 이것들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언어가 그것들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언어결정론과 멘털리즈     



                                                                                             그런데 사피어와 워프의 이 언어결정론은 척 들으면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이지요? 멋있어 보입니다. 세계 이전에 언어가 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명제입니다. 사실 《성경》의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말'이라는 건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자연언어가 아니라 신의 말, 또는 신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니까 우리 주제와는 상관없는 겁니다. 아무튼 언어가 인식을 결정한다, 언어가 생각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처음 들을 땐 일리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워프는 자신의 이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에스키모, 다시 말해 이누이트에게는 '눈'을 가리키는 말이 400개나 된다는 거짓말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누이트 언어에 눈을 가리키는 말이 다른 자연어어들보다 많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건 고작 네 개 정도라고 합니다. 이누이트의 일부 언어에선 내리는 눈과, 땅에 쌓은 눈과, 바람에 흩날리고 이는 눈과, 바람에 흩날려 한곳에 쌓인 눈을 구별한다고 합니다. 한국어로는 다 '눈'이라고 부르고, 영어로도 다 '스노(snow)'라고 부르지요.
  사실 워프에게는 400개든 네 개든 그게 중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네 개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눈을 가리키는 단어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보다 눈을 네 배나 섬세하게 경험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워프의 주장이 옳을까요? 워프의 주장이 옳다면 영국인이나 한국인은 쌓인 눈과 내리는 눈, 바람에 휘날리는 눈을 구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각각의 눈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런 눈들에 상응하는 단어가 없을 뿐입니다. 그래도 다른 방식으로는 표현할 수 있습니다. '쌓인 눈' '바람에 휘날리는 눈' '내리는 눈',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피어-워프 가설은 틀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연언어, 자기 모국어로만 생각한다. 자기 모국어 바깥에서는 사고하지 못한다. 자기 모국어 바깥에서는 인식하지도 못한다'는 게 사피어와 워프의 생각인데, 이 이론은 지금 완전히 폐기됐습니다. 이건 완전히 사기다, 라는 걸 가장 명료하고 통쾌하게 폭로한 사람이 스티븐 피어라는 사람입니다. 이 양반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저보다 네 살 정도 위입니다. 캐나다 출신의 미국학자인데 심리학자라고 불러도 좋고 인지과학자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어쨌든 스티븐 핑커는 '사피어와 어프 저 사람들은 사기꾼이다. 우리는 영어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중국어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어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생각의 언어(language of thought)로 생각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생각의 언어'란 영어나 중국어나 한국어 같은 자연어어의 기저에 있는 공통언어입니다. 이 공통언어를 핑커는 멘탈리즈(mentalese)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생각하고 인식하는데 사용하는 언어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영국 사람이건 중국 사람이건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언어로, 자기들 모국어 저 아래 숨겨져 있는 멘털리즈로 사유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제 모국어가 지령하는 대로 세계를 분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지요.
  영어에 'be'라는 동사가 있지요? be동사를 스페인어에서는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be동사에 해당하는 단어가 스페인어에는 'estar'와 'ser' 둘이 있습니다. estar는 존재나 일시적 상태를 뜻하고, ser는 영구적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예컨대 'You are pretty'라는 영어를 스페인어로는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estar 동사를 써서 'Estás guapa'라고 말하면 '너 (오늘 특히) 예쁘네'라는 뜻이고, ser 동사를 써서 'Eres guapa'라고 말하면 '넌 미녀야'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이 두 문장을 영어나 한국어로 직역해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하고 해서 영국인이나 한국인이 이 두가지 표현의 의미 차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그리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스페인어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겠지만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어에는 없지만, 우리는 'He loves a girl'과 'He loves the girl'의 차이를 압니다. 이 두 문장의 차이를 머릿속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앞의 문장은 그 남자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는 거고, 뒤의 문장은 그 남자가 특정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거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둘을 구별합니다.
  사피어-워프 가설이 틀렸다는 건 특히 색채어휘에서 드러납니다. 한국어는 색채어휘가 굉장히 세밀하게 발달한 언어인데, 그렇다고 한국인의 색채감각이 외국인에 비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한국인의 색채감각이 외국인보다 특별히 뛰어나다면 뛰어난 화가들이 외국보다 훨씬 많이 나와야 했을 텐데, 그건 아니거든요.(웃음)

/고종석의 문장에서 발췌


Posted by 세이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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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생각

스크랩 2014. 8. 1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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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의 한국어판 출간을 두 달 앞둔 2014년 5월 27~30일, 케임브리지에서 장하준으로부터 직접 신간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경제학은 정치다



책에서 "경제학은 정치다.(Economics is politics!)"라고 하셨는데요.


경제는 정치이고 경제는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게 제 중요한 주장 중 하나입니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경제학자들 자체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가 경제학을 쓸 때는 '경제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이었습니다. 그때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죠. 20세기 들어 신고전주의학파가 득세하면서 이를 '경제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경제학은 과학이니까 정치 논리나 도덕적 윤리 기준은 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식으로 경제학을 탈정치화된 학문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요즘 좌우를 막론하고 '정치 논리가 경제에 개입하면 안 된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저는 정말 틀린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경제가 뭔지를 규정하는 것 자체가 정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9세기에는 노예를 사고 팔아도 되고 아동 노동도 허용됐고 공해 물질을 배출해도 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때는 노에와 아동 노동도 경제에 포함했지만 지금은 최소한 선진국에서는 누가 노동 시장 유연화를 위해 아동 노동을 도입해야 한다는 얘기 합니까? 경제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거든요. 아동 노동이 있으면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바뀐 것이 나이라, 결국은 아동 노동이 옳지 않다고 사람들이 받아들였기 대문에 정치적으로 금지한 것입니다. 경제 자체가 정치에 의해 결정되는데 어떻게 경제에 정치 논리를 개입하지 말라고 얘기하죠? 그런 분들이 하는 이야기의 본질은 '내 정치 논리는 경제니까 건드리지 말고 네 정치 논리는 (내가 보기에)정치니까 개입하지 마라.' 이런 얘기입니다.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결정하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할 수도 없고요. 많은 부분은 기숙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여야죠.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런 부분도 바뀔 수 있다는 거예요. 경제도 정치라는 것을 이해하면 경제 현상이 지질이나 해일처럼 불가피한 현상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게 됩니다.



요즘 세계적으로 정치 혐오가 유행입니다. 우리나라만 그런 줄 알았더니 유럽에서도 정치 무대에서 비정치인 출신이 인기를 끄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런데 경제학에서도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게 있지 않습니까?"



정치 혐오라는 게 현재 주류 경제학인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는 아예 DNA에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경제에서 정치를 빼낼까' 하는 것이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관심사 중 하나입니다. 물론 신고전주의 학자들이라고 모두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건 아니지만, 정치 혐오가 되기에 굉장히 좋은 체질을 갖고 있는 경제학이죠. 소득 재분배 문제를 자원 배분 효율성 문제에서 떼 내려는 시도를 많이 하고, 당연히 이론도 그런 쪽으로 발달했고요. 경제학을 과학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니 경제에서 정치를 떼 내고 싶어 하죠. 정치라는 것이 들어오면, 결론이 나지 않고 '의견 차이'라는 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신고전주의학파 경제학자들은 최근에 '정치는 나쁜 것이다.'라는 이론을 많이 개발했습니다. 신고전주의학파가 예전에는 정부 개입을 옹호하는 이론도 많이 발달시켰죠. '후생경제학'이라고 해서 1920~1930년대에 시장 실패론을 개발했습니다. 시장에 그냥 맡긴 채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게 만들면 그 결과가 사회적으로는 더 안 좋을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규제 없이 생산하라고 하면 기업이 공해 물질을 너무 많이 배출하는 것처럼, 시장이 사회적인 이익을 담보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국가가 개입할 수 있고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 시장 실패론입니다.

그런데 1970~1980년대에는 시장 실패론의 반대로 정부 실패론을 개발했죠. 신고전주의학파 경제학자들 중에 정부 개입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크게 보면 같은 학파임에도 시장 실패론과 척을 지는 정부 실패론을 만든 거예요. 정부 실패론은 정부의 정책이라는 게 (옛날 플라톤이 이야기한 '철인'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정치인과 관료, 그들에게 로비하는 이익 집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들이 제대로 하곗느냐는 것이죠. 시장이 실패하더라도 그 비용을 감수하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에요. 정부더러 개입해서 고치라고 하면, 고치기는커녕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는 거죠. 그 이론이 지난 30여 년 동안 소위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굉장히 많이 지원 사격한 겁니다.

지금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니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있을 때마다, '경제에 정치 논리가 개입하면 더 나빠진다' '시장이 완벽한 건 아니지만 정부 실패보다 시장 실패가 나으니 그냥 놔 둬라.'라며 정치 혐오를 더 키운 거죠. 이론 자체가 공익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거잖아요. 정치인도 관료도 자신의 사익을 위해 정치에 뛰어들고 공직에 나선다는 거니까요. 그런 이론을 따르다 보면 '맞아, 다 나쁜 사람들인데 어떻게 믿고 맡겨?' 이렇게 되는 거죠.



일견 맞는 말이지 않습니까. 나쁜 사람들 많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항상 제일 위험한 것이 '일견 타당성이 있는 이론'입니다. 딱 짚어서 '나쁜 정치인이 있잖아.' 하고 보여 주면 '맞아, 정치 나빠.'라고 하기 좋거든요. 정치 혐오라는 게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느냐면요. 제일 심각한 게 아마 미국일 텐데요. 제가 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부시와 고어가 대선에서 맞대결할 때인데, 『파이낸셜 타임스』에서 여론 조사를 했어요. '누구를 지지하냐', '왜 지지하냐' 뭐 이런 일반적인 질문도 있었지만, 특이하게 '싫어하는 후보는 왜 싫어하느냐'라고 물어본 거예요. 부시 지지자, 고어 지지자 할 것 없이, 제일 많은 응답은 '너무 정치적이다'라는 거였어요. 아니, 그런데 정치인들이 정치적이어야지, 정치적이지 않으면 더 큰일 나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대답을 할 정도로 정치라는 것이 ㄴ나쁜 말이 돼 버렸습니다. 이런 정치 혐오가 어떤 결과를 만드느냐면, 민주주의가 무력화되는 거죠. 국민이 정치를 싫어하기 시작하면, 우리나라뿐 아니라 비정치인이 비정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지를 얻는 경우가 많잖아요. 파키스탄에도 크리켓 선수 출신인 임란 칸(Imran Khan)이라는 사람이 중요한 정치인이에요. 이탈리아에서도 몇 년 전 선거에서 코미디언이 이끄는 정당이 주요 정당으로 부상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인기를 끈 가장 큰 이유가 그들이 정치인이 아니라는 거였어요. 정치를 혐오하다 보면 결국 나오는 결과가 '정치적으로 경제에 개입해 봤자 안 된다, 더 나쁘다'라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믿게 되면 모든 걸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죠.



이 정치 혐오 뒤에는 기득권층의 의도가 있다고 보시는 거죠.



그렇죠. 시장이라는 건 '1원 1표' 아닙니까. 돈을 가진 만큼 영향력을 갖는 거죠. 시장을 통해서는 돈이 없는 일반 국민이 중요한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어요. 물론 시장이 중요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부분이 있지만, 시장에만 맡겨 놓으면 균형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없으니 도입한 게 민주주의잖아요. 1원 1표의 시장 논리를 1인 1표의 정치 논리로 제약해서, 가령 '수돗물이나 우편 서비스 등 누구나 받아야 하는 공공 서비스는 시장에 맡겨 두지 말고 정치 논리로 결정하자', '어느 선까지 시장이 작용하는 어느 선부터는 정치가 개입해야 하는지를 정치 논리로 결정하자'라는 거거든요. 그것이 민주주의이고 그래서 도입한 거잖아요.



최근 한국에서 관피아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관료들이 퇴직 후 다시 업체의 뒷배를 봐주는 등 이런 식으로 '관료 출신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그러니 물, 교통… 이런 공공재를 시장으로 가져가야 한다.' 이런 논리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 이런 속담이 있어요. "탱고를 추려면 두 명이 필요하다." 정부 관료의 부패는 민간 부문의 파트너가 있어서 부패하는 겁니다. 부패의 소지가 생긴다고 규제를 없앤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랴.'라는 게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정부 관료의 부패를 줄이고 규제의 투명성을 높여 부패를 없앨 것인가를 고민해야지, 구더기가 생기니 장을 담그지 말자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공공재가 시장으로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1원 1표다. 그러니 1인 1표가 되도록 해야 한다?'



모든 것을 1인 1표의 논리로 결정하려면 시간도 많이 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안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대강은 1인 1표의 민주주의 원칙에 의해 정해야 하는 거죠. '먹는 물 사업을 민영화할 것인가?' 이 문제는 민주주의가 정해야 하는 것이죠. 물, 의료 등 공공성이 높은 것을 민영화하면 다 해결될 것처럼 얘기하는데요.

첫째, 소위 말하는 신고전주의학파에도 왜 그런 공공재를 민영화하면 안 되는지 근거를 제시하는 이론들이 많습니다. 소위 공공성이 높은 물건이니 서비스는 국영으로 운영하거나 최소한 정부의 규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론은 신고전주의학파에도 많아요. 그런 얘기를 빼놓는다는 건 신고전주의 경제학도 제대로 모르는 거죠.

둘재, 민영화한다고 효율성이 실제로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미국 의료를 에로 들어 볼까요. 완전 민영화돼 있잖아요. 미국 GDP의 17퍼센트가 의료비에요. 선진국 중 국민소득 대비 의료비 지출이 가장 높습니다. 그런데도 건강 지표는 선진국 중 하위권입니다. 다른 나라보다 의료비를 50퍼센트, 100퍼센트 더 쓰는데도요. 영국이나 스웨덴의 경우, 의료비 지출이 국민소득의 10퍼센트, 11퍼센트밖에 안 되거든요. 그런데 건강 지표는 미국보다 좋단 말이죠.

이처럼 신고전주의학파 이론 중에서도 일부만 가져와서 민영화하고 규제 완화하면 다 될 것처럼 말하는 건 하다못해 신고전주의 경제학 이론도 제대로 모르고 말하는 것이고, 실제 이것이 적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미국만 해도 신고전주의학파 이론대로 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배후에는 가치 판단을 배제한 과학적 분석이나 이론이 있기보다는 기득권이 있는 거죠?



모든 경제학이 기득권만 옹호하는 건 아니겠죠. 경제학파에 따라서 다르고, 특히 마르크스 경제학 같은 경우는 노동자의 이익을 옹호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고전주의 경제학처럼 자기네들은 정치색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건 제일 위험한 거예요. 사실은 숨어 있는 정치색과 어젠다가 있거든요. 마르크스처럼 '우리는 노동자 편이다', 리카도처럼 '나는 자본가 편이다' 이야기하면 도니ㅡㄴ데, 신고전주의 경제학은 그게 아니예요. 자기들 이론은 과학적인 거라고 얘기하면서 실제로는 누구 편을 드니까 더 문제인 거죠.



민영화 관련해서 경제학적 논리를 주장할 때는 학문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정하게 정치적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그렇죠. 정치적인 의견이죠.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에요. 하다못해 우리가 객관적인 지표라고 여기는 GDP만 해도 그 아래에는 이론이 다 깔려 있고 그 이론의 정치적 입장이 있는 거예요. 한번 볼까요. 여성의 가사 노동은 GDP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하기 어려워서 그런 거 아니에요. GDP 추산할 때 별걸 다 추산하거든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기 소유의 주택에 살 경우 그 사람이 남의 집에 임대로 살 때 내야 하는 비용까지 추산해서 GDP에 반영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자기 집에 사는 사람은 공짜로 사는 것처럼 돼 버리니까요. 그런데 가사 노동은 반영 안 해요. 굉장히 정치적인 결정이죠. GDP뿐 아니라 모든 숫자에 이론과 가정이 깔려 있고 그 이론적 가정에 정치적 입장이 있는 겁니다. 정치적 입장이 있다는 건 누군가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고요. 정치적인 것을 배제한 경제 정책이나 경제 이론은 있을 수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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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정해져 있어.

너희는 듣기만 해."라는 경제학자



책에서 많은 경제학파를 말씀하셨어요.



9개 주요 학파를 얘기했습니다. 고전주의학파, 신고전주의학파, 케인스학파, 마르크스학파, 슘페터학파, 개발주의 전통, 행동주의학파, 제도학파, 오스트리아학파예요. 작은 학파까지 하면 훨씬 더 많죠. 경제학을 '경제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면 학파가 그렇게 많습니다.

경제학을 신고전주의학파적으로 '합리적 선택 이론을 써서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니 경제학파는 딱 하나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이는 카톨릭만 기독교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같아요.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카톨릭, 정교, 개신교 등 주요 분파가 3개 있잖아요. 경제학도 그렇습니다. 시장주의 경제학도 3학파가 있어요. 고전주의학파와 신고전주의학파, 오스트리아학파가 다 시장주의 학파인데 그 이론이 다르단 말입니다. 신고전주의학파라고 모두 시장주의도 아니고요.



그 많은 경제학파 중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학파가 배울 점이 있고 잘못된 점이 있으니까요. 특히 신고전주의학파와 마르크스학파가 제일 심해요. 그들은 정말로 자기들만 맞고, 다른 학파는 틀렸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다른 학파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많죠. 케인스학파도 앞의 두 학파 정도는 아니지만 자기들만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 많죠.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이 책 여러 군데에서 강조했어요.

예를 들어 싱가포르 하면 '자유 무역 하고 외국인 투자 환영해서 성공했다더라.' '우리도 싱가포르처럼 돼야 한다.'라고 시장주의자들이 많이 얘기하는데요. 싱가포르 토지의 90퍼센트 이상이 국가 소유입니다. 주택의 85퍼센트를 국영 주택 공사에서 공급하고, 국민총생산의 22퍼센트를 국영 기업에서 생산해요. 우리나라가 옛날에 민영화하기 전에도 기껏해야 10퍼센트였거든요. 세계 평균이 8~9퍼센트 정도 될 겁니다. 통계 내리기가 어려운 것이라 세계 평균은 얘기하기 힘들지만요. 싱가포르는 한편으로 보면 제일 자본주의적인 나라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제일 사회주의적이란 말이죠. 그럼 어느 이론이 싱가포르를 다 통합해서 설명할 수 있겠어요. 하나의 이론을 가지고 그 이론이 등한시하는 이슈를 이해하려면 틀 자체가 빈약해서 이해가 불가능한 거예요. 다른 학파도 마찬가지죠. 여러 이론을 알고 융합해야 복잡한 경제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요. 이게 진리고 저건 틀렸다 해선 안 되죠.

소위 방법론적인 다원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 중에도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해도 내가 맞는데, 그래도 평화 공존 해야 하니 너는 네 거 하고 나는 내 거 하자.' 이런 사람도 있어요. 저는 그것도 틀렸다고 생각해요. 진짜로 마음을 여는 태도를 가져야 해요. 모든 학파가 할 말이 있고, 이슈에 따라 할 말이 많은 학파가 있고 적은 학파가 있고, 특정 나라에 더 잘 맞는 이론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이론이 있고, 우리의 도덕적, 정치적 가치관에 따라 이 이론이 맞을 수도 있고 저 이론이 맞을 수도 있다….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주장 중 하나예요. 대부분의 경제학자들 사이에선 굉장히 인기가 없는 주장이겠죠.



그렇다면 일반 시민들이 경제학 이론을 해석할 때는 어떤 경제학 이론이 옳은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봐야겠군요.



그렇죠. 경제학 이론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야 누가 더 맞는가로 싸우는 게 필요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럴 필요까진 없거든요. 비유하자면,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고 자동차 정비나 제작 공정까지 배워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어떻게 해서 이 경제학 지식을 가지고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우리가 당면한 경제 문제를 더 잘 이해하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알면 되는 거예요.



경제학을 잘 이용하라는 말씀이죠.



네. 그래서 이 책 부제 자체를 '사용자 설명서(The User's Guide)'라고 붙인 거예요. 경제학이라는 것이 유용할 수 있는 학문인데 자꾸 경제학자들이 '진리는 우리 독점이야. 너희는 우리 말만 들으면 돼'이런 식으로 하니, 사람들이 점점 더 경제학에서 멀어지는 거죠. 그래서 그걸 고쳐 보려는 겁니다.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는 관심이 엄청 많잖아요. 그런데 시시콜콜 다 알아서 관심 갖는 게 아니거든요. 저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침공한 건 잘못이라고 말하지만 국제정치학을 공부해 본 적은 없어요. 30년 전에 교양 과목으로 한 번 들은 게 다예요. 그래도 의견이라는 게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경제학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들이 그런 의견을 가질 수 없냐는 말이에요.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우리는 논리적으로든 실험으로든 뭔가를 증명할 수 있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경제학은 과학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도 그런 태도가 있어요. 자기들은 진실을 안다는 거죠. 이는 신고전주의학파와도 통하는 면이에요. 진실은 하나뿐이고 지금 당장은 100퍼센트 몰라도 열심히 연구하면 알 수 있다는 생각이에요.

'우리만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 주류 경제학인 신고전주의학파 경제학이 갖고 있는 태도의 큰 문제 중 하나입니다. 어느 정도까지인가 하면요. 신고전주의학파는, 뭐랄까 사악한 가정이 많잖아요. 예를 들어, 인간은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고도 하고요. 사람들이 남을 생각하고 봉사하는 것도 다 자신을 위한 것이며 그래서 위선이라고 하죠. 즉 자기들은 위선이 아니라 진실을 그대로 까발려 준다는 태도예요.

물론 그런 면이 없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면만으로 세상이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젊은 학생들은 그런 어두운 면에 노출되면 현혹된단 말이죠. 그런 식으로 한번 추종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다 그렇고, 세상은 다 정글이고'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이 논리만 맞는 것이라고 빠져드는 거죠.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특별 부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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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가 구글의 미래입니다.”

 지난달 26일,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들의 학술모임 중앙비즈니스(JB)포럼에 나온 NHN 김상헌(49) 대표의 말이다. 네이버는 국내 검색시장의 70% 정도를 차지하지만 전 세계 기준으로는 10명 중 9명 이상이 구글을 선택한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 없는 그가 왜 이렇게 말한 걸까. 김 대표는 노트북으로 네이버에 접속해 ‘잠실야구장’을 검색했다. 잠실야구장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와 함께 경기 일정, 예매, 가는 길 등이 한 화면에 일목요연하게 펼쳐졌다. 같은 내용을 구글로 검색했다. 위키피디아 등 잠실야구장이 포함된 웹페이지가 떴다.

 “사람들은 왜 잠실야구장을 검색할까요? 오늘 무슨 경기가 열리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서죠. 이것이 네이버식 ‘정답형 검색’입니다. 성 김 미국대사가 유독 한국에서만 구글이 힘을 못 쓰는 이유가 뭔지 묻더군요. 이 화면을 보여주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김 대표는 ‘구글코리아도 인기 콘텐트를 화면 상단에 배치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예로 들며 “우리가 이긴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방향은 제대로 잡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도 많다. 네이버는 자신의 서버에 저장된 정보만 보여준다는 것이다. 누군가 홈페이지에 올린 원글보다 그곳에서 ‘불펌(불법적으로 퍼오는 것)’해 온 네이버 블로그 글이 먼저 나온다는 지적이다.

 -모든 정보를 독식하는 공룡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우리가 이것저것 다 하는 건 검색 때문이다. 정보를 긁어모아 보여주는 검색을 더 풍성하게,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다. 구글이 콘텐트 업체를 사들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게 콘텐트 공급자들에게 피해를 끼친 부분이 있는 점도 알고 있다. 정확한 결과를 내놓으면서도 콘텐트 생산자, 포털, 검색으로 이어지는 건전한 생태계를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사업영역을 무리하게 확장한다는 비판이 많다.

 “중국·러시아를 제외하면 자국 검색사이트가 없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구글을 쓴다. 구글이 검색으로선 최상의 서비스라고 믿는 거다. 네이버가 없었다면 우리도 잠실야구장을 검색하는 데 지금의 10배 넘는 시간을 써야 했을 거다. 국내시장 1위 사업자라는 시각에서만 보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오픈마켓 시장 진출에 비판이 많은데, G마켓과 옥션을 보유한 이베이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70%가 넘는다. 세계시장에서 보면 네이버는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다.”

 -다윗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크지 않나.

 “지금까지 국내에서 벌어진 전투에선 구글을 이겼지만 여전히 구글이 무섭다. 웹 검색에서 시작한 구글은 스마트폰 운영체계(OS) 안드로이드를 인수하더니 휴대전화 제조업체(모토로라)까지 손에 넣었다. 서비스에서 콘텐트·하드웨어까지 모두 갖고 있다. 아마존 역시 책이라는 콘텐트를 중심으로 확장을 거듭해 전자책 단말기에 이어 태블릿PC까지 만든다. 플랫폼 전쟁에서 앞서나가고 있는 것이다. 서비스 사업만 하고 있는 네이버로서는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김 대표는 서울대 법대 82학번이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와 나경원 새누리당 의원이 동기다. 3년간 판사로 일하다 LG그룹으로 이직해 11년간 일했다. 2007년 NHN에 합류해 2년 뒤 대표가 됐다. 김 대표는 “NHN의 규모가 커지자 이해진 NHN 의장이 대기업의 경영 노하우를 접목하고 싶어 영입을 제의했는데, 마침 법 관련 업무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경영을 해보려던 참이라 합류했다”고 말했다.

정답형 검색

입력한 키워드와 일치하는 웹페이지만 단순히 보여주는 일반적 검색과 달리 입력한 단어의 의미를 파악해 가장 적합한 정보를 먼저 보여주는 시맨틱(Semantic) 검색 방식을 의미한다. 아직 컴퓨터로는 이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없어 네이버에서는 사람이 관련된 콘텐트를 편집하는 방식을 쓴다. 원하는 정보에 보다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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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민정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아리수’ 딜레마에 빠졌다. 이명박 시장 당시부터 정수시설 설치 등을 위해 5000억원에 달하는 예산을 퍼부었지만 아리수에 대한 시민의 인식은 여전히 ‘마실 수 없는 수돗물’이기 때문이다.

역시 이명박 시장 당시부터 준비했던 페트병 아리수의 판매도 막힌 상태다. 시민들의 피같은 세금이 투입된 정책을 접을 수도, 접지 않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모습이다.
 
◇ 음용률 1% 안돼..달리 방안도 없어

박 시장은 지난 16일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한달음에 서울 서대문구 서대문로의 상수도사업본부를 찾았다. 일본 요코하마 가와이 정수장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풀어놓고 직원과 아리수 활성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역대 시장 중 상수도사업본부를 방문한 시장은 박 시장이 유일하다.

일본에서도 박 시장의 머릿속은 아리수로 가득했다. 요코하마 시민의 수돗물 음용률은 40%에 달했다. 반면 서울시민의 수돗물 음용률은 1%에 못미치는 실정이다.

19일 서울시에 따르면 상수도사업본부는 지난 2007년부터 올해까지 4973억원을 투입해 아리수 고급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6개 정수장에 신개념의 최첨단 정수기법을 도입해 수돗물에서 나는 특유의 맛과 냄새를 없애고 오존 소독 과정을 추가하는 등 수돗물의 수질과 맛을 좋게 만들었다고 자평하고 있다.

수천억원의 예산을 들여, 수돗물을 끓이지 않고도 마실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 놨지만 시민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땅히 음용률을 높일 방안이 없는 것도 또다른 문제로 지적된다.
 
◇ 페트병 유료화 막혀..해외 진출도 올스톱

서울시가 국내 판매와 해외 진출을 염두해 두고 생산하기 시작한 350ml 페트병 ‘아리수’는 더욱 골칫거리다. 수돗물 병입 판매 시설비만 강북아리수정수센터 17억원, 영등포센터 30억원 등 모두 47억원을 쏟아부었다. 이명박, 오세훈 전임 시장때의 일이다.

서울시는 페트병 아리수의 유료 판매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번번이 국회에서 막히는 상황이다. 환경부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지난 2008년부터 지속적으로 편의점·슈퍼마켓에서 페트병 수돗물 판매를 허용하도록 법률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통과되지 못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국내 여론을 감안해 국내 판매는 하지 않고 해외에 수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시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중국 및 동남아 시장 진출도 멈춘 상태다. 현행법상 국내에 시판되지 못하는 물 제품의 해외 판매가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페트병 아리수는 청와대 등 정부기관과 공공행사에 제공되고 있다. 또 가뭄, 수해, 지진 등 재해 발생지역에 지원품 형태로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물사유화저지공동행동과 서울사회공공성연대회의 관계자는 “페트병 수돗물을 판매하면 일반 수돗물에 비해 700~800배 가격이 비싸진다”며 “시민 세금을 페트병에 쏟아붓느니 수도관을 유지, 보수하는데 사용해야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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