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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는 명백한           

한국어                      


                                                                                                  한국어 문장은 번역문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로 글을 쓸 때 번역 문투를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설령 번역 문투를 피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해도, 고유어만으로 된 문장을 쓰는 건 전혀 불가능합니다. 어떤 글이든, 그것이 진지한 논문이든 아니면 비교적 가벼운 기사 글이든, 글에서 쓰는 말은 우리 고유어보다 한자어가 훨씬 많습니다. 그 한자어의 70~80퍼센트는 19세기 말 이후에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한자어는 1900년대 말까지는 아예 없었던 말들입니다. 한자어 중에서 개화기 이래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어를 통해 들어온 것이 압도적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전에 중국어를 통해서 들어온 말도 있습니다. '천지天地' '세상世上' '부모父母' 같은 말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말들은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 한국과 일본에서도 쓰이게 된 말입니다. 일본에서 난학을 포함한 양학이 개화하기 전의 한자어는 거의 다 중국 사람이 쓰는 말을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 빌려서 썼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이후 한국이 일본의 정치적ㆍ문화적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면서 한국어에서는 일본제 한자어들이 중국제 한자어들을 압도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이제 한국어가 되었습니다. 완전한 한국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문화文化'라는 말은 영어 culture를 일본 사람들이 文化라고 번역한 것이 우리말에 수입돼 우리식 발음으로 읽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화는 일본어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닙니다. 그것은 명백한 한국어입니다. 文化를 '문화'라고 읽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한국어 사용자들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글에서 한자어를 쓰지 않겠다는 강박관념을 지닐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한자어는 우리말입니다. 명백한 한국어입니다. 사실 한자어를 전혀 안 쓰겠다고 마음 먹으면, 우리는 두세 문장도 쓰기 어려울 겁니다.

 

한국어의 세 가지 층: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        



                                                                                       고대 이래로 중국에서 한자어가 천천히 차용되면서, 그리고 19세기 말 이후 일본에서 한자어가 급속히 차용되면서 한국어 어휘에는 층이 생기게 됐습니다. 고유어와 한자어의 층이 생긴 거지요. 그 위에 외래어가 있습니다. 고유어와 한자어와 외래어는 차례로 한국어 어휘부를 형성했습니다. 맨 아래에 고유어가 있고, 그 위에 한자어가 있고, 맨 위에 외래어가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그 세 층의 단어들은 유의어를 이루기도 합니다. 예컨대 소젖(쇠젖)과 우유와 밀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외래어는 한자엄나큼 많지는 않으니까 이런 세 층의 유의어들은 드물고, 고유어와 한자어 두 층으로 이뤄지는 유의어쌍이 한국어에는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여름옷과 하복, 겨울잠과 동면, 가을밤과 추야, 봄바람과 춘풍, 가슴둘레와 흉위, 몸무게와 체중, 뺌셈과 감산, 곰셉과 승산, 덧셈과 가산, 나눗셈과 제산, 제곱과 자승, 세모꼴과 삼각형, 가로줄과 횡선, 세로줄과 종선, 아침밥과 조반, 배앓이와 복통, 살갗과 피부,온몸과 전신, 엉덩이와 둔부, 누에치기와 양잠, 피와 혈액, 목숨과 생명, 사람과 인간, 날씨와 일기, 값과 가격, 곳과 장소, 새와 조류 따위가 그렇습니다.
  이런 유의어쌍들을 보면 고유어들은 대체로 친숙한 느낌을 주고, 한자어들은 공식적인 느낌을 줍니다. 나쁘게 말하면, 고유어들은 좀 없어 보이고, 한자어들은 좀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고유어와 한자어가 유의어쌍을 이룰 때 문장에서 한자어를 쓸 것이냐는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어떤 경우엔 한자어가 더 적절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엔 고유어가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나라사랑이 지나쳐서 될 수 있으면 고유어만 쓰겠다, 라고 마음먹은 사람은 그래도 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한자어는 절대 안 쓰겠다' , 그건 아주 바보 같은 짓입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건 한국어만의 현상이 아닙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말에서는 한자어라고 부르는 단어들을 일본어에서는 간고漢語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도 간고는 좀 있어 보이고, 고유어는 좀 없어 보입니다. 물론 없어 보이는 대신에 친숙함과 정감이 있지요. 이것은 한국어에서나 일본어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아, 그리고 세상에 동의어라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유의어가 있을 뿐입니다. 제가 앞에서 예로 든 고유어와 한자어들의 쌍도 동의어가 아니라 유의어일 뿐입니다. 이 말들이 똑같은 맥락에서 똑같은 의미와 뉘앙스를 지니고 쓰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뜻이 비슷한 말은 존재해도 뜻이 완전히 겹치는 말은 없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에 고유어와 한자어의 유의어쌍이 있듯이, 영어에도 고유어, 게르만계 단어라고 부르죠, 암튼 고유어와 프랑스계(라틴계) 단어들의 유의어쌍이 있습니다. 1066년에 프랑스 노르망디라는 지방을 다스리던 윌리엄이라는 사람이, 프랑스말로는 기욤이라고 부릅니다만, 잉글랜드에 쳐들어가 정복왕조를 세운 뒤에 오래도록 잉글랜드 상류층에서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만 썼기 때문입니다. 한참 뒤에 프랑스와의 100년전쟁으로 반프랑스 감정이 심해져서 잉글랜드의 귀족들도 영어를 쓰기 시작할 무렵엔, 이미 영어에 너무나 많은 프랑어계 단어가 침투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영어에는 게르만계 단어와 프랑스-라틴계 단어의 유의어쌍이 무수히 존재합니다. 동사를 예로 들어보자면, to give와 to donate, to hinder와 to prevent,  to answer와 to reply, to understand와 to comprehend, to bury와 to inhume, to foretell과 to predict, to sweat과 to perspire, to end와 to finish, to sell과 to vend, to uproot와 to eradicate, to begin과 to commence, to feed와 to nourish가 그 예입니다. 영어에서도 한국어나 일본어에서와 비슷하게, 게르만계 단어들은 친숙하되 좀 없어 보이고, 프랑스-라틴게 단어들은 좀 딱딱되 있어 보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골짜기를 뜻하는 게르만게 단어 dale은 비슷한 뜻의 프랑스계 단어 valley보다 더 우아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것은 한국어에서 한자어 '족'이 고유어 '발'보다 좀 비속하게 들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예외적입니다.
  명사를 예로 든다면, 영어의 inside와 interior, outside와 exterior, birth와 nativity, backbone과 spine, breath와 respiration, work와 labor의 관계는 한국어의 안과 내부, 바깥과 외부, 태어남과 출생, 등뼈와 척추, 숨쉬기와 호흡, 일과 노동 사이의 관게에 얼추 견줄 만합니다. 앞쪽은 정감 있고 친숙하되 좀 없어 보이고, 뒤쪽은 딱딱하게 들리지만 좀 있어 보입니다. 이 말들이 동의어가 아니라 유의어라는 사실을 다시 강조해야겠습니다. 게르만계 단어들에 대응하는 프랑스-라틴계통의 유의어들이 영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듯, 고유어에 대응하는 한자어 유의어들은 한국어를 풍부하게 만듭니다. 그것들은 솎아내야 할 찌꺼기가 아니라 품어 안아야 할 자산입니다.
  그것은 이 유의어들이 호환이 안 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컨대 '목숨'과 '생명'을 봅시다. '우리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자'는 '우리 생명을 걸고 조국을 지키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꽃도 생명을 지니고 있다'라고는 말하지만, '꽃도 목숨을 지니고 있다'라고는 말하지 않스비다. '목숨'은 유정명사에만 쓰일 뿐 '꽃' 같은 무정명사에는 쓰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정명사는 사람과 짐승(벌레도 마찬가지입니다)을 아우르는 말이고, 무정명사는 식물과 무생물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유정명사와 무정명사 얘기가 나온 김에 여격 조사 '-에'와 '-에게'에 대해서 잠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격 조사 '-에게'는 유정명사 다음에 붙고 '-에'는 무정명사 다음에 붙습니다. 그래서 '철수에게 물을 주다' '소에게 물을 주다'라고 말하는 반면 '꽃에 물을 주다' '돌에 물을 뿌리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문적 글쟁이들 가운데도 이걸 구별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거 꼭 기억해두세요. 여격 조사 '-에게'는 유정명사, 즉 사람을 포함한 동물 뒤에 쓰고, '-에'는 무정명사, 곧 식물과 무생물 뒤에 씁니다!
  다시 '목숨'과 '생명'으로 돌아가봅시다. '생명'은 사물에 대해 비유적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미당 서정주의 작품들은 생명이 길 거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당 서정주의 작품들은 목숨이 길 거야'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또 '한 생명을 잉태하다'라는 표현은 자연스럽지만, '한 목숨을 잉태하다'라는 말은 부자연스럽니다. 이렇게 '목숨'과 '생명'은 비록 유의어라고는 할 수 있을지라도, 서로 교환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목숨'만 필요한 게 아니라 '생명'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명백히 서로 교환할 수 없는 유의어싸은 드물지 않습니다. 피와 혈액은 봅시다. 혈액은 물질로서의 피만을 가리켜서 위학적 뉘앙스를 갖습니다. 그래서 생명현상과 관련된 다양한 비유의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예컨대 '피 끓는 젊음' '정말 피를 말리는구먼' '피를 나눈 사이'라는 말은 장녀스럽습니다. 그렇지만 '혈액이 끓는 젊음'이나 '정말 혈액을 말리는구먼'은 틀린 한국어이거나 익살이죠. 누구에게선가 수혈을 받았다면 그 사람과 '혈액을 나눈 사이'라고 말할 수도 있곘지만, 이 역시 어색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라고는 해도 '머리에 혈액도 안 만른 놈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웃음) 물론 웃자고 하는 얘기일 수는 있겠죠.
  사람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와 '사람은 말물의 영장이다'라는 문장만 보면 인간과 사람이 동의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쓰임새는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다소 추상적인 단어여서 '사람'이 사용되어 구체적 문맥에서 '사람'을 대체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였네'라거나 '저기 사람이 있네'라거나 '젊은 사람이 왜 그래?'라거나 '프랑스 사람' 같은 표현에서 '사람'을 '인간'으로 바꾸면 틀린 한국어이거나 비아냥거림이 되고 맙니다. 다시 말해 이들 경우에는 특수한 문제적 의도를 노렸을 때만, '사람'을 '인간'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Posted by 세이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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