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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에서 온 한자어         


                                                                                             제겐 동서의 문명교섭에서 가장 찬란하게 느껴진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눈부시게 찬란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 있습니다. 18세기 말, 그러니까 쇼군이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그즈음에 시작된 '난학蘭學(란카쿠)'의 장면입니다. 막부 시대는 천황에게 아무런 힘이 없던 시절입니다. 천황은 쇼군의 꼭두각시였어요. 천황이 힘을 가지게 되는 건 메이지 유신 때부터입니다. 메이지유신으로 왕정복고가 돼 천황이 국가의 실질적 우두머리가 되기 전의 일본은 당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쇄국정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예외를 뒀습니다. 나가사키예요. 제2차 세계대전 때 핵폭탄이 떨어졌던 나가사키 말입니다. 막부는 오직 이 항구 도시에 오직 네덜란드 사람들만 들어와서 교역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유럽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곳의 일본인 통역사들과 에도(지금의 도쿄)의 지식인들이 힘을 합쳐 '네덜란드 배우기 운동'을 벌입니다. 이것을 난학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중국 빼고는 자신들이 세상에서 제일 센 줄 알았는데, 사실은 막부가 들어서기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뒤 명나라를 정복하겠다고 조선을 침공한 것을 보면 중국도 별 게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막상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유럽문물을 접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네덜란드어 사전편찬 작업을 시작으로 유럽 문물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난학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네덜란드만이 아니라 서양문물 전체를 연구하는 양학洋學(요가쿠)으로 발전합니다. 미국으로부터 강제로 개항을 당하고 보니, '아, 네덜란드보다 센 놈들이 많구나 영국이나 미국은 네덜란드보다 훨씬 세구나' 하는 걸 알게 되지요. 아무튼 난학에서 시작된 양학은 그 뒤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 노선을 뒷받침합니다.
  난학의 시작이 네덜란드어 사전편찬이었듯, 난학을 포함한 양학의 요체는 번역이었습니다. 번역이라는 게 본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본의 난학자들이 수행한 번역은 특히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동아시아에 없던 개념들을 번역해야 했으니까요. 아무튼 난학자들과 메이지유신 이후의 양학자들은 두 세기에 걸쳐서 서양문명 전체를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그 번역의 수단이 한자였습니다.
  당시 동아시아는 유럽인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유일한 문명권이었는데, 일본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에 앞서서 유럽을, 서양 세계 전체를 한자로 번역해버린 겁니다. 그 한자어가 바로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어의 대다수를 차지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번역 과정에서 만들어낸 한자어의 상당수는 심지어 한자의 원산지인 중국에까지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한국은 말할 나위가 없지요. 원래 우리가 쓰던 한자어는 중국 한자어와 구조가 많이 닮았었는데 지금의 한자어는 대부분 일본 한자어와 구조가 같습니다.
  일요일ㆍ월요일ㆍ화요일… 같은 요일 이름들, 수소니 산소 같은 원소 이름들, 연설이니 재판소 같은 말들은 죄다 네덜란드어를 일본 사람들이 한자어로 옮긴 것을 우리가 받아들여, 우리식 발음으로 읽고 있는것입니다. 일부 극단적 국어순수주의자들, 순혈주의자들처럼 일본에서 만든 한자어를 하나도 쓰지 말자고 결심을 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단30초도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가 다 그렇습니다. 사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말도 일본 사람들이 만든 한자어입니다. 이런 말을 쓰면 안 된다고 말하는 주장, 곧 '언어민족주의'라는 말도 일본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언어' '민족' '주의' 모두 일본 사람들이 유럽어를 번역하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제든 중국제든 한자어를 쓰지 말자는 것은 입 다물고 살자는 뜻입니다. 이 한자어 이야기는 다음번 강의 때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종석의 문장에서 발췌


Posted by 세이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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