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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빙과> 때부터 느꼈지만 주제 선정,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스타일 자체가 제 취향이라서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 고전부 시리즈의 장점 중 하나는 역할 배분이 절묘하게 되어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주인공인 고전부원 4인의 포지션 선정을 훌륭하게 해 놓고 학교 곳곳에 시선을 흩뿌려 놓으니 축제의 분위기가 정말 잘 전해졌습니다. 이 정도로 학원제 분위기를 잘 살린 소설은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 밖에 생각이 안 납니다.

다양한 인물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작품은 산만해지기 쉽다는 단점이 있는데, 사실 이 작품도 복선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조금 산만해지긴 합니다. 하지만 사이즈가 원체 큰 이야기가 아니니까 헷갈리거나 그럴 일은 없어요. 조금 헷갈려도 금세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오레키의 동선이 간소화되어 있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인데, 장점을 들자면 탐정 역인 오레키의 분량을 줄여 일상과 비일상의 배분을 매우 절묘하게 했다는 점, 단점을 들자면 해결부가 다소 무리하게 진행되는 점이 그렇습니다. 범인을 밝히는 과정을 최후의 최후로 미뤄 살짝 역순으로 보여주는데, 그 때문에 안정감 있게 진행되던 템포가 약간 비약합니다. 의도적이었겠지만, 오레키의 시선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범인을 밝히는 과정이 다소 뜬금없게 느껴집니다.

다른 고전부원들은 학원제 나흘간 각자 의미 있는 경험을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작품의 진상을 듣는다든지,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을 해본다든지, 친구처럼 변화해보고자 무리한 목표에 도전한다든지. 그런데 오레키는 그럴만한 게 없죠. 다른 아이들이 발로 뛰어다닌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으니까.
그래서 작가는 오레키를 위해 '볏짚 부자 프로토콜'도 만들고, 중요한 과제인 '괴도 십문자 잡기'도 남겨 두지만 이건 오레키 호타로 개인에게 별 의미 있는 일은 아닙니다. 다른 아이들의 경험이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물물 교환 릴레이나 범인 찾기는 개인적이기에는 다소 모자란 사건이죠. 일어나든지 말든지 하는 작은 해프닝, 혹은 문집을 팔기 위한 방편이에요.


이 점은 같은 시리즈의 전작 <빙과>나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 보여준 오레키-사건의 관계와 비교해 보면 더 잘 드러납니다.
<빙과>에서 오레키는 사건에 차츰차츰 휘말려 들어가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졌고, 최후에는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 영문 모를 분노까지 느낄 정도로 깊이 공감하게 되죠.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는 이리스에게 휘둘려서 거짓 진상을 밝혀냈다는 자괴감에, 그 사실을 부원들에게 지적 당했다는 사실까지 겹쳐 폭주해서 진상을 밝혀냅니다. 이 두 사건은 오레키가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오레키 자신을 변화시키려 하는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이 겹쳐서 오레키와 전혀 상관 없던 사건이, 개인적인 사건으로 변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도식으로 그리면 이렇게 됩니다.


동료들이 사건을 가져옴->동료 때문에 추리를 함->추리가 잘못되었다는 게 밝혀짐->잘못을 고치기 위해 진상을 추리해냄


<빙과>와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는 이 도식을 따라서 '에너지 절약주의자'를 자청하는 오레키 호타로가 명탐정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점층적으로, 또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어요. 하지만 이번 <쿠드랴프카의 차례>는 거기까지 들어가지는 않죠. '십문자 사건'은 오레키나 고전부원 동료들에게 개인적으로 개입해 들어오지 않아요. 반대로 고전부원들이 문집을 팔기 위해서 공격해 들어가죠. 그래서인지 오레키와 사건간의 관계는 이전과 다르게 조금 멀고, '십문자의 진상을 추리해냄'에서 '십문자를 협박하여 문집을 팔아치움' 사이에 약간의 비약이 발생해요. 이해는 되면서도 공감은 되지 않는 정도의 아주 미묘한 비약이죠.


그런데 또 이렇게 비약을 해서 결국 보여주고자 했던 진상이 굉장히 재밌습니다. 구구절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요는 '저녁에는 송장이'라는 작품 속 가상의 추리만화를 둘러싼 두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한 축은 고전부원 이바라 마야카가 만화 연구회 부원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작품인 '저녁에는 송장이'의 내막에 서서히 접근해 가는 과정이고, 또 하나는 탐정역 오레키 호타로가 '십문자 사건'을 추리해나가는 중에 '저녁에는 송장이'라는 작품이 사건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한 축입니다.
그런데 첫작 <빙과>에서 이미 학원제의 속칭인 '간야제'가 비극적인 이름임을 설정하고 들어가서일까요? '저녁에는 송장이'라는 작품에 얽힌 이 두 이야기도 약간 쓸쓸하고, 조금은 비극적이며 어딘가 씁쓸한 느낌으로 막을 짓네요. 학원제의 떠들썩한 밝은 면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어두운 면을 배치한 요네자와 호노부의 솜씨가 정말 감탄이 나오도록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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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이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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