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사회와 진실

   -<호모 세파라투스>, <날 보러와요>

 

1. <호모 세파라투스>에서 당시 한국 사회의 분단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과 태도를 토론해보자.

 

  작가는 매우 냉철하게 분단현실을 작품에서 드러내고 있다. 양쪽으로 나누어진 도시, 박제화가 되버린 '저쪽', 서로 증오하며, 증오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 분단으로 인해서 목숨을 잃은 사람, 그리고 그들을 추모하며 증오를 다짐하는 행사... 모든 것들이 너무 선명하여 짐짓 식상할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토록 냉철하고 분명하게 현실을 비유한 것과는 달리, 작가의 어조는 매우 평이하며 때로는 무기력하기까지 하다. 매우 비판적인 시각에서 출발하였다면 당연히 드러나게 될 문제의식에 이르러, 작가는 그것을 힘을 다해서 외치지 않고 그저 문제를 드러내보이는 선에서 마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작품의 주인공인 장자의 소극적인 태도, 그리고 그를 후원해주려는 아버지의 무기력한 포기, 마음속으로만 그를 지지하려는 학장의 비겁한 외면, 그리고 핵심인물인 시장의 몰락 등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그들을 제지하고 짓누르려는 유지들- 신문 발행인, 사업가, 어머니, 차자 등은 매우 강한 어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주인공의 소극적인 행동조차도 틀어막는다. 그리고 심지어 작품 내에서 작가가 가장 강력한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은, 이 분열사태를 조장하고 유지시키려는 박제사인 것이다.

 

  즉, 작가는 분단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는 했으나, 그것을 통해서 강력한 메시지를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작품의 비판적인 날카로움은, 그저 작가의 놀라울 정도의 논리적인 비유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지 이야기의 흐름이나 작가의 어조는 그저 조용조용하며 매우 침잠해 있다. 무기력한 주인공과 강력한 적대자를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성이나 고백에 가까우며, 작품에서 작가가 심정적으로 가장 깊게 다루는 위치는 학장이나 아버지에 오히려 가깝다.

 

 

 

2. <호모 세파라투스>에서 쓰여진 여러 가지 상징들에 대해 토론해보자.

 

  이 작품은 우화적 기법을 썼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상징들이 등장한다. 이것들을 전부 다루기에는 시간과 지면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강렬한 상징 세 가지를 뽑아본다.

 

  첫째는 박제이다. 박제는 이 작품의 핵심을 관통하는 키워드일뿐 아니라 작가가 가장 강력한 힘을 부여한 박제사의 직업이기도 하다. 박제사는 박제를 "속을 비우고 지푸라기를 집어넣어,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박제가 된 것은 사람이건 도마뱀이건 간에 박제사의 말을 따르게 되고 자신만의 생각이나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저쪽의 사회를 묘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박제사의 말을 따랐을 때, 저쪽의 사회가 얼마나 획일적이며 경직되고 또 맹신적인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분단현실과 작품의 비유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는데, 작가가 말하는 박제는 공산주의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획일되고 맹신하는 사회를 말한다. 즉 그것이 어떤 이념이 되었건 인간을 그저 이념의 인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박제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늪. 늪은 도시 이쪽과 저쪽의 갖은 더러운 것과 하수가 흘러들어가 고여 썩은 지대이며, 도시 양측의 완충지대이기도 하다. 여기에 근접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가까이 다가가면 기관총으로 사격한다. 즉 늪이 상징하는 것은 도시 분단의 현실이며 학장과 아버지는 여기에 견디지 못하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늪은 역으로 장자와 저쪽 여자의 사랑이 피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두 남녀는 늪에서 만나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박제사의 말에 따르면 두 도시의 화합의 열쇠이다.

박제사 : 오직 사랑만이 나뉘어진 양쪽 문제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박제사 :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유일한 해결이지요.

  즉, 도시의 중간지대인 늪은 도시의 모든 문제를 결집해놓은 엉망진창인 장소인 동시에, 양측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들어있는 장소이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세번째는 종소리이다. 종소리는 대학에 걸린 종에서 나는 소리이며, 동시에 장자는 이것을 두고 "사람들을 꾸짖는 소리"라고 표현한다. 학장은 장자가 밤에 찾아온 뒤에야 몰래 그에게 자신도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음을 고백한다. 종소리는 양쪽으로 나뉘어진 도시에 대한 비판의식이며 현실 고발이다. 종소리는 '호모 세파라투스'들에게 분열의 폐해를 경고하고 그들에게 분열을 멈출 것을 호소한다. 그래서 그 종소리의 의미를 알아듣는 사람들은 그것을 꾸짖음이라 느끼고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그 종소리를 더 널리 전파하고 그 뜻을 전해야 할 학장은, 자신의 말이 종소리에게 피해를 끼칠까봐 그 의미를 알아듣는 사람을 제지한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 귀엔 우리 대학의 종소리가 '뎅그렁 뎅그렁!' 허공을 울리는 쇳소리로만 들리거든" 학장의 암묵적인 동의로 인해서 종소리는 다시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허무한 꾸짖음이 되고 만다.

 

 

3. <호모 세파라투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박제사와 관광객들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각각 설명해보자.

 

  일단 관광객들의 역할과 기능부터 논하겠다.

  관광객은 정적인 무대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광광 안내인과 떼거리의 사람들로 구성된 관광객 패는, 작품 이곳저곳을 소란스럽게 돌아다니면서 오로지 대화와 실망으로 연결되는 작품의 정적인 움직임을 보완한다. 그렇게 관광객은 작품의 심각한 분위기를 상당부분 해소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심각한 분위기를 해소한다'는 것이 작가가 의도한 바인데. 그들은 이 도시에 속하지 않은, 도시의 미래와는 전혀 상관없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시가 분열하든 결혼을 하든 못하든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데서나 사진을 찍어대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다가 시간이 되면 호텔로 돌아가서 자고, 또 다음날 구경하다가, 돌아갈 때가 되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이 도시를 구경거리로 전락시키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가치들을 전혀 심각하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박제사는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자 그 기능이 몹시 흥미로운 역이다. 박제사는 '박제'라는 작업을 통해서 분열을 고착화시키며 또한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인물이다. 분열 자체가 그로 인해서 생겼는지 아니면 분열 이전부터 그가 있었는지는 작품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바가 아니니 일단 다루지 않겠다.

 

  박제사는 작중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통제하며 조종한다. 그는 시장을 움직여 남녀를 결혼시키게 하고/ 신문 발행인과 사업가의 사무실에 나타나 결혼을 무시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결국에는 차자를 조종하여 여자를 박제화시킨다. 마치 박제된 도마뱀을 그의 뜻대로 움직이듯 말이다. 그의 이런 행동력과 치밀한 계획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며 관객들은 그를 두고 비인간적인 사이코패스를 떠올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작가의 또다른 분신인 것이다.

  작가는 그에게 박제사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무엇이든 가능한 행동력과 비상한 머리, 그리고 마음을 파고드는 말재주를 선물한다. 그리고 마치 그가 불가능한 것이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그의 계산대로 돌아가듯이 만들어놓는다. 사실 인간에게 이러한 행동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박제라는 행위 역시 너무나 상징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작품 내에서 박제 작업은 도마뱀의 박제를 통해 잔혹하고 건조하게 이미지되나 실제적인 인간의 박제 작업 현장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즉 작가는 그에게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서 막대한 파워를 주어준 것이다. 그리고 마치 분열된 현실을 그가 조장한 것처럼 꾸며서 그를 '분열을 조장하고 유지시키는 강대하고 비인간적인 세력'의 화신으로 만든다. 사실 그 힘은 작가가 부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박제사는 작품 내에서 약역을 담당할뿐 아니라 작품을 움직이게 하고 작품 내 세계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절대자적인- 역 데우스 엑스 마키나같은 역할이며 이는 작가의 또다른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작가와 작가의 분신은 구별할 필요가 있는데,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곧 분신이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창조주로서의 힘을 박제사에게 대부분 이양했으나, 그에게 마음이란 것을 주지 않았다. 즉 박제사는 세계를 만드는 거대한 축이기는 하나 작가가 그 세계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일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가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아버지나 학장에 가까우며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종소리와 ㅇ장자에 대한 연민의 시선에서 작가의 본심을 파악할 수 있다.

 

 

4. <날 보러와요>에서 변태적 살인 사건의 문제를 갖고서 어떻게 진실의 존재 문제로까지 주제를 심화시켜나가는가에 대해 토론해보자.

 

   이 연극은 수많은 자료 조사와 리얼한 극화를 통해서 마치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범인 찾기의 지난한 수사 과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범인을 뒤쫓는 형사들에게 자신을 대입하게 하며, 끝내 용의자를 검거했을 때 '이 사람이 정말 범인이 맞는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함으로서 끝내는 '범인임을 결정짓는 증거는 무엇인가' '무엇이 범인과 아닌 사람을 구별하는가' 라는 의문에까지 이르게 한다. 즉 범인을 뒤쫓는 과정은 단순히 형사와 범인의 추격전이 아니며, 진실을 추적하고 구별해가는 과정에 관객을 동참시키는 것이며 그 과정의 끝에 정말 진실을 마주했을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는 방법에 의문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5. <날 보러와요> 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사건 용의자들과, 박기자와 미스김의 성격과 극중 역할에 대해 토론해보자.

 

  박기자와 미스김에 대해서 먼저 논해보겠다. 박기자는 작중 범인 담당 팀을 드나들며 기사를 찾아내는 사회부 기자이자 조형사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여기자이다. 그녀는 형사팀과 외부 여론을 잇는 통로로서 그 통로를 통해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여론이 형성됨을 보여준다. 박기자와 형사팀의 관계는 수사기관과 미디어의 관계를 형상화한 것이며 박기자 자신은 형사팀에 우호적인 인물로, 때로는 그들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하나 결국은 그들을 응원하는 여론을 대표하고 있다.

  미스김은 형사팀의 단골 다방 레지이자 김형사를 사모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커피를 핑계로 김형사에게 접근하여 결국 그와 사랑에 빠진다. 김형사와 사귀기 시작한 후 그녀는 일에만 매달리는 김형사의 사랑에 목말라 하며 자살 시도까지 한다. 그녀는 격무에 시달리는 형사의 주변사람, 특히 가족과 연인을 의미하며 진실을 쫓는다는 가혹한 작업 끝에 무고한 주변 사람들도 메말라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사건 용의자 세 명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첫번째 용의자는 '이영철' 정신이 이상한 또라이로 정신착란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으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증언이 인정받지 못한다. 두번째는 '남현태' 술주정뱅이 몽상가로 사건 정황과 거의 들어맞는 진술을 하지만 전부 꿈속에서의 일이라고 우긴다. 마지막 용의자 '정인규'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범인인듯 하지만 과학적 검식 결과 범인이 아님이 드러난다.

  세 용의자는 각자 다른 캐릭터를 가졌으면서도 동일한 연기자가 연기한다. 그들은 반사회자이거나 사회 부적응자이며 범행에 굉장히 근접해 있으나 결과적으로 증거가 부족하여 풀려난다. 이들은 지난한 진실 추적 과적의 목적이자 진실 추적을 좌절시키는 장애물이다. 형사들은 이들을 잡아서야 진실을 찾아낼 수 있지만, 그들이 형사에게 주는 대답은 언제나 진실을 좌절시키는 것뿐이다. 극이 최후로 치달아갈수록 형사들의 감과 힘은 예리하고 집중되어 가지만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결국 용의자의 용의주도한 범행이 아니라 적절한 수단과 적확한 논거에 의해서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6. <날 보러와요>는 기본적으로 추리극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세부적인 전개 과정을 살피고, 그것이 관객의 긴장과 이완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자.

 

  이 작품의 미학은 긴장과 이완의 세밀한 조정과 배분이다. 극은 세 명의 용의자를 전체적으로 배치하고 중간중간에 인물간의 긴장관계, 갈등을 통해서 긴장과 이완을 조절한다. 이는 박기자와 김형사, 조형사의 갈등, 미스김과 김형사의 갈등, 김반장과 박기자의 갈등, 조형사와 김형사의 갈등 등을 통해서 작은 무대 안에서 사건이 끊임없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흘러가도록 한다.

  그리고 세 명의 용의자는 이런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형사팀을 순환하면서 작품의 큰 줄거리와 흐름을 조성한다. 그들을 쫓고 놓치는 과정은 극의 핵심적인 내용이며 긴장과 이완의 순환구조를 그린다.

 

 

7. <호모 세파라투스>와 <날 보러와요>를 각각 주제, 구성, 인물, 대사의 측면에서 비교해보자.

 

 두 작품의 인물부터 비교해보겠다. 날 보러와요는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적은 수의 인물들이 촘촘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갈등과 이완을 반복하여 극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그에 비해 <호모 세파라투스>는 보다 많은 수의 인원이 등장하지만 소극적인 주인공과 암담한 배경설정 등 때문인지 굉장히 침잠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여기서의 긴장관계는 시장과 박제사의 대립, 그리고 장자와 장자의 가족의 대립 정도로 드러나며 그 구도 역시 심하게 기울어 있으므로 긴장이 발생하기 어렵다. 이는 인물관계가 헐겁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심지어 관광객들은 극의 핵심내용과 멀리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는 입장에 서 있다.

 

  대사의 경우 <날 보러와요>는 매우 현대극적인 어법을 쓰고 있으며 거의 현실에서 쓰는 말과 같은 대사를 사용한다. 그럼으로서 <날 보러와요>는 극을 매우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며 인물들에 몰입하기 쉽도록 유도한다.

 <호모 세파라투스> 역시 현대적인 어투를 쓰고 있으나 때로 너무나 고백적인, 혹은 선언적인 대사를 내뱉은 인물들은 그들이 관객과 큰 거리를 갖고 있다고 느끼게 하며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들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형상화된 우화임을 환기시킨다.

 

  구성의 경우 두 작품은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공통점은 두 작품의 순환구조인데, <날 보러와요.는 같은 연기자가 연기하는 용의자가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며 마지막에는 김형사에게 실루엣을 드러냄으로서 이같은 일이 계속해서 벌어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호모 세파라투스>는 도시를 드나드는 기차를 통해 시장과 관광객이 순환하면서 비슷한 일을 반복하는 것을 암시한다.

  차이점은 극의 장르가 다름으로서 생기는 것인데, <호모 세파라투스>의 경우 관광객의 이야기와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크게 나누어지면서 같은 장소를 둘이 교차해 지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통해서 분단현실에서 비롯한 단단한 분열의 고착화를 형상화하고 있다. <날 보러와요>는 범인을 쫓는 형사팀의 사무실에 무대를 집중시킴으로서 촘촘한 인간관계와 긴장구조를 유발하고 있으며 이는 추리극의 리얼리티를 더하고 있다.

 

  두 작품의 결정적인 차이는 주제에서도 드러나는데, 사회 비판적인 태도는 비슷하나, <날 보러와요>는 진실을 쫓는 형사들의 애환과 인간관계, 그리고 사건을 통해 산산히 흩어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진실을 쫓는다는 작업의 지난함, 애처로움, 고난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결국 팀이 범인을 잡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난 뒤에 김형사를 찾아오는 범인의 모습은 진실 추적이 무산으로 돌아가는 순간에 진실을 드러냄으로서 거기에 진실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은 추리극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진실의 존재와 그것을 추적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범인은 분명히 있다. 보러와라.

 <호모 세파라투스> 역시 현실사회의 문제와 그것의 형상화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이 작품은 고발적이거나 비판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동정하고 부끄러워하는 데 머물고 있다. 즉 작가는 이것을 드러냈을 뿐 어떤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보여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박제사에게 큰 힘을 부여하고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둠으로서 우리가 호모 세파라투스를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있다. 종소리의 꾸짖음. 그것이 박제사의 대칭에 있는 작가의 해답인 것이다.

 

Posted by 세이브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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