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빚 해소보다 일자리가 절박… 21세기판 뉴딜정책 펴야
미국에서 실업률이 10%대로 치솟는 것은 이례적 사건이다. 대공황 충격에서 벗어난 1940년대 중반부터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 직전인 2000년대 중반까지 60여년 동안 실업률이 10%를 넘어선 적은 거의 없었다. 제2차 오일쇼크 여파로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상승 현상)이 발생한 1982년 9월부터 10개월 연속 10%대를 기록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는 글로벌 실업 공포를 일깨웠다. 2000년대 들어 3%대까지 떨어졌던 미국 실업률은 2009년 10월 10%대로 급상승했다. 실업률은 이후 조금씩 내려 지난달 8.1%를 기록했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장기 실업자가 구직 활동을 포기해서 나타나는 착시(錯視) 효과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세계 경제 회복을 위해 대대적인 부양책 같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MIT대학의 피터 다이아몬드(Diamond) 교수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마찰적 실업' 이론을 확립한 공로로 2010년 10월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경제학 대가(大家)이다.
"지금 세계 경제가 당면한 최우선 과제는 실업 해소입니다.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는 실업 문제 해결 없이는 미래도 없습니다."
케네스 로고프(Rogoff) 하버드대 교수와 카르멘 라인하트(Reinhart) 메릴랜드대 교수가 2008년 공동 논문인 '이번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에서 주장한 것처럼, 다이아몬드 교수는 "지금의 위기는 경기 순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시적 위기가 아니라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구조적 위기"라고 진단한다. 특히 청년 실업자와 장기 실업자의 증가가 세계 경제에 엄청난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다이아몬드 교수가 내놓은 해법은 이렇다. "위기 탈출과 성장 기반 확보를 위해 중앙은행과 정부가 대대적인 부양책(stimulus programs)을 펼쳐야 합니다. 중앙은행은 완전 고용을 목표로 물가 상승을 용인하는 공격적 통화정책을 실시해야 하고, 정부도 사회기반시설 투자를 통해 일자리 만들기에 적극 나서야 합니다."
그의 이런 주장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억제가 각국 중앙은행의 지고지선(至高至善)적 과제라는 세계 경제학계의 통념을 깨는 발상의 전환이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Weekly BIZ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지금은 비상 상황인 만큼 중앙은행의 역할 변신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현재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벤 버냉키(Bernanke) 의장의 스승이다. 버냉키는 1970년대 MIT대에서 다이아몬드 교수 등의 지도 아래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버냉키 의장이 스승의 '훈수'를 수용해 적극적인 부양책을 펼지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노벨상 수상 직전인 2010년 4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FRB 이사 지명을 받았다가 야당인 공화당이 계속 반대하자, 1년여 후 스스로 FRB 입성을 포기했다. 지난달 말 Weekly BIZ는 매사추세츠주 렉싱턴에서 노(老)교수를 만났다.
피터 다이아몬드 교수 인터뷰는 여러 차례 일정 조정 끝에 어렵게 성사됐다. 그는 인터뷰 사흘 전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인터뷰가 가능할지 모르겠다"는 이메일을 갑자기 보내왔다. 결국 인터뷰 장소를 MIT대가 있는 보스턴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그의 자택으로 급하게 바꿨다.
한적한 주거 지역에 있는 그의 집은 외벽이 하얀색으로 칠해진 2층짜리 주택이었다. "지난 4월 초 왼쪽 다리에 갑자기 통증이 찾아온 후 병원행 외에는 외출하지 않았다"고 밝힌 그는 실내에서도 용이 새겨진 지팡이를 짚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교수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대적 부양책이 지금 꼭 필요하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대규모 도로 공사 같은 '제2의 뉴딜 정책'으로 작금의 경제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부도 가능성 낮아… 대대적 부양책 펴야"
―미국 경제가 당면한 가장 큰 과제를 꼽는다면?
"높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경기 부양(浮揚)을 위한 재정 정책이다. 미국 경제는 지금 케인스(Keynes)식 용어로 말하자면 '심각한 총수요 부족'에 빠져 있는 상태이다. 장기적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는 사회기반시설 투자가 크게 부족하다. '기술 진보가 성장의 동력'이라는 로버트 솔로(Solow·198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이론도 참고해야 한다. 정부가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한 것은 분명 실수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전과 비교할 때 요즘 노동시장에서 가장 달라진 변화가 있다면?
"현재 미국 노동시장의 가장 큰 특징은 빈 일자리(job opening)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점이다. 늘어난 실직자 때문에 빈 일자리가 예전에 비해 빠른 속도로 채워지고 있다. 실업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은 교육에도 문제가 있다. 재(再)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인력이 부족한 분야도 많지만, 정작 적합한 인력이 없어 채우지 못하는 곳도 많다."
―세계적인 고(高)실업 현상은 언제쯤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전망가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예상은 못 한다. 문제는 유럽의 경제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이다. 유럽은 경제 규모가 커서 전 세계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 장기 실업자가 엄청나게 늘고 있는데, 이는 미래 생산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청년 실업 문제는 더욱 심각한 상황인데.
"임금 노동자의 소득은 학교 졸업 후 30대 중반까지 가파르게 늘어난다. 이 시기에는 경험도 가장 많이 축적된다. 하지만 청년들이 인적 능력을 높일 적절한 일자리를 갖지 못한다면, 개인에게는 물론 국가의 미래 경쟁력에도 큰 손실이다. 이런 이유에서 국가 부채 축소보다 실업 해소가 더욱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공공 부채 비율이 이미 100%를 넘어섰다. 부양책을 쓰면 재정이 더 악화할 게 뻔한데?
"국가가 부채 문제에 빠지는 것은 만기를 연장할 능력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 채권자들이 만기를 연장해 주지 않고 앞다퉈 자금 회수에 나선다면 채무자는 부도를 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부도를 맞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부채 축소는 급격하게 이뤄질 필요가 없고 천천히 고쳐 나가면 된다."
―섣부른 부양책 추진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초래할 것이다.
"지금은 비상 상황이다. 인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부양책을 망설여서는 안 된다.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나 정부가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점은 부양책의 효과가 얼마나 클 것인지다. 재정 정책이 중요한 이유는 FRB가 갖고 있는 다른 어떤 수단보다 부양 효과가 강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인플레이션 억제를 강조한다. 양적(量的) 완화에 따른 문제가 더 크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많다.
"각국 중앙은행은 대부분 인플레이션 목표를 2%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3%보다 2%가 경제에 더 좋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최근 로고프(하버드대 교수), 블랜처드(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크루그먼(프린스턴대 교수) 등 많은 학자가 인플레이션 목표를 4%로 올려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다. 물가가 갑자기 오르면 문제가 되겠지만, FRB가 적절한 통제력을 유지한다면 괜찮다. 2%선 고수는 미신(迷信)일 뿐이다."
―중앙은행이 실업 해결에 나서는 게 효과가 있을까?
"중앙은행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세 요소가 있다. 첫째 인플레이션이다.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조절하는 가장 큰 행위자가 돼야 한다는 사실에는 이론(異論)이 없다. 둘째는 실업이다. 중앙은행은 총수요 확대 등으로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 셋째는 금융시장 안정이다. 과거에는 이를 무시했지만 최근 많은 사람이 의식하고 있다. 학자들은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탄다는 건
90년대에 했던 고용시장 연구
최근 실업이 이슈되며 상 받아
학문적 성과보다 타이밍이 중요
◇"학문적 평가와 노벨상 수상은 별개… 행운 따라야"
―현재 시점에서 세계경제의 최대 변수는 무엇인가?
"유럽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 여부다. 유럽은 '천천히'가 아니라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리스는 너무 느리게 움직여 엄청난 비용을 초래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노동시장 개혁에 나섰지만, 정치적 저항 때문에 개혁의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긴축 정책도 재고해야 한다. 네덜란드는 부채 문제를 겪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긴축에 나서고 있다. 당연히 경제에 부정적 효과를 줄 것이다."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자'는 버핏세가 최근 미국 의회에서 부결됐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수는 늘려야 한다. 하지만 버핏세는 조세 체계에 복잡한 주름을 만들기 때문에 좋은 대안이 아니다. 조세 구조를 전면적으로 뜯어고치기보다 세율을 조정하는 것이 훨씬 직관적이고 단순하다. 특히 초고소득층이 받는 고소득이나 배당금 등에 대한 세율 인상이 재정 문제 해결에 더 효과적이고 적절하다. 세금 감면 제도도 손봐야 한다. 왜 두 번째 주택 구입을 위한 이자의 세금을 깎아주어야 하나?"
―당신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FRB 이사(governor)에 지명됐다가 의회의 반대가 계속되자 이사직을 포기했다. FRB 이사가 됐다면 무엇을 했을 것인가?
"나는 1960년대는 세금, 70년대는 연금과 사회보장, 80년대는 고용을 집중 연구했으며 2000년대 들어 금융시장에 대해 연구할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금융회사가 문제를 악화시키고 위험을 높이고 있다면,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위험을 낮추기 위해 어떻게 규제 정책을 디자인해야 할까? 이는 중요한 학문적 연구 주제다. FRB 이사가 되면 금융시장 안정성 관련 연구에 기초 자료가 될 중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측면에서 FRB 이사 자리를 원했다."
―MIT대학에는 유능한 신진 교수가 많다고 들었다. 그들 가운데 누가 노벨상을 탈 것으로 보는가?
"사실 MIT는 물론 학계에 수상 자격이 있는 후보자는 엄청 많다.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수상자를 선정하는 시점에 어떤 주제가 부각될지 알기 어렵다. 솔직히 나는 1990년대에 고용에 대한 연구를 했는데, 21세기 들어 실업(失業)이 세계적 이슈가 되는 바람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게 된 측면이 크다. 타이밍이 정말 좋았던 것이다. 많은 전문가로부터 노벨 경제학상을 받을 것이라고 평가받는 교수가 적지 않다. 하지만 학문적 업적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것과 노벨상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 ▲ 그래픽=정인성 기자 1008is@chosun.com 출처: corbis/토픽이미지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25/2012052501188.html